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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인 Aug 19. 2023

[수술일지] 응급이야

2023-08-18 빰뻬가 왔다.

24/7 응급콜을 받고 있다.


전공의 때는 당직이 많은 대신 당직이 아닌 날에 불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근데 어차피 일이 안 끝나서 퇴근을 못 했지만. 펠로우 때는 당직은 물론 당직이 아닌 날에도 시도 때도 없이 불려 왔다. 우리 병원 외과는 그래도 펠로우와 전공의 숫자가 어느 정도 되어서 교수가 당직을 서지 않는다. 대신 펠로우 선에서 응급환자 해결이 어려우면 병원에 출동해야 한다.


응급실로 오는 신규환자뿐만 아니라 본인이 수술했던 환자에게 문제가 생긴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직접 해결하러 새벽이든 휴일이든 집도의가 나와야 한다. 누군가의 몸에 칼을 댄다는 것은 그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뜻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평생의 A/S를 해주는 것이다. 환갑이 넘는 우리 스승님은 지금도 환자가 안 좋으면 새벽 1시라도 병원 나오셔서 응급수술을 하신다. 해외에 있거나 몸이 안 좋아서 물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이거나 정말 내 몸뚱이도 믿고 맡길 수 있는 후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교수님들은 본인이 수술했던 환자의 합병증은 직접 해결하신다. 모두 그렇게 배웠다.




외래 환자 수가 갑자기 늘어 예상보다 너무 지연되면서 1시간 30분 늦게 일이 끝났다. 내가 외래를 늦게 끝내는 바람에 함께 늦게 퇴근하게 된 간호사샘들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간호사님이 위로해 주셨다. "88분 지연되셨어요......"


"노력했는데"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너무 힘드네요... 어떻게 해야 하지."


4시 10분에 4명이 예약되었고 4시 20분에 3명 4시 30분에 3명... 거의 10분에 3명은 봐야 지연 없이 시간을 지킬 수 있다. 외과도 이런데 내과는 오죽할까!


"제 개인적인 느낌인데요,"간호사샘이 말했다. "환자들이 여자 선생님들에게 더 많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 같아요. 더 설명을 잘해주실 것 같아서 그런가? 그래서 지연이 잘 되더라고요."


"예약된 환자 숫자와 시간이 말도 안 되는데요. 진짜 3분 진료를 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3분 진료 해야 해요 선생님..."간호사샘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드셨다. "진짜 그러지 않으면 답이 없어요."


"그게 근데 정말 어려워요...... 마음 약해져서..."


환자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모두 다 대답해주고 싶은데 현실이 이러하니 좌절이다. 설명을 길게 하면 모두가 오버타임을 하게 될 것이고 예약된 환자 수를 줄이면 적자가 난다고 나를 자를 것이고. 저녁을 대충 먹은 뒤 집에 들어갔다.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9시 반쯤 자려던 참에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까 수술방이었다.


"여보세요?"


"어 난데..." 혈관외과 펠로우를 하고 있는 동기 오빠의 목소리다. 사실 레지던트 동기인데 졸업 후 군대 3년을 다녀와서 이제야 펠로우를 시작했다. "응급실에 11cm small bowel mass(소장 종괴) 환자 수술 도와줄 수 있어?"


"11cm?? 응급으로 해야 하는 환자예요?"


"응... 빰뻬(panperitonitis, 복막염)야. 바이탈(활력징후)도 안 좋대."


빰뻬 - 주로 장천공으로 생기는 복막염을 줄여서 부른 것으로 급한 응급수술을 요한다.


너무 지친 나머지 인간으로서 내적 딜레마가 생겼다. 나는 오늘 당직도 아니다. 응급실로 온 소장수술은 원래 우리 병원에서 펠로우가 하는 것이다. 펠로우란 전문의 자격증을 딴 존재로 나도 펠로우 때 맨날 했던 수술이다. 전문 분야가 혈관외과인 오빠가 해결하기엔 어려워도 우리 위장관외과 펠로우들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우리 유능한 펠로우들이 있어. --라며 나 자신을 설득했다.


"혹시 오늘 위장관파트 당번 펠로우한테 연락해 보는 것은 어때요..? 제가 지금 집인데 병원에 가려면 3-40분 걸려서. 병원에 아직 우리 펠로우 남아있으면 저보다 빨리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래... 그럼 한 번 연락해 볼게!"


"네..! 혹시 그들도 어렵다고 하면 다시 연락 주세요."라고 전화를 끊었다. 계속 멍하니 전화를 봤다. 내 마음속 양심이라는 것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저히 신경 쓰여서 못 참았다. 바로 원격 EMR(전자의무기록)을 켜서 그 응급환자의 CT 영상을 봤다.


엄청나게 큰 덩이가 소장을 먹었고 뿐만 아니라 복막에도 전이가 되어있으며 주변 혈관들도 많고 딱 봐도 수술이 어려울 것 같았다. 위치도 소장 중간이면 나은데 십이지장 근처여서 까다로웠다. 물론 우리 유능한 펠로우들도 하게 되었다면 결국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꽤나 애먹을 정도의 난이도가 높은 케이스다.


"오빠." 다시 전화를 걸었다. "CT 보니까 너무 심하네요. 그냥 제가 갈게요."


양심이란 놈은 매번 이렇게 도움이 안 된다.


"그래! 고마워! 나도 도와줄게."


"아니 이런 환자가 있었으면 미리 좀 알려주지!" 친한 동기 오빠였기에 살짝 투정 부렸다. "그럼 애초에 집에 안 갔죠."


"미안미안 나도 방금 연락받았어." 착한 오빠는 대답했다. "내가 미리 배 열고 있을게 조심히 와."


밤 10시 30분쯤 병원 도착했고 수술은 어려웠지만 당직 전공의와 당직 펠로우였던 동기가 도와주는 덕분에 무사히 잘 끝날 수 있었다. 수술 후 환자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래... 그래도 지난달부터 응급수당이 생겼지.' 생각하며 다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전에는 휴일이나 야간에 수술을 하면 교통비 5만원 밖에 못 받았다.

아무리 길고 힘든 수술이어도 5만원이 전부였다.


요즘에 필수의료 그리고 응급진료에 대해 이슈가 되다 보니까 지난달부터 당직 아닌 날 야간 또는 휴일에 응급수술을 하게 되면 약간의 수당을 주기로 원내 정책이 바뀌었다고 한다.

2023년 7월. 지난달에 처음 생긴 제도다.

그렇다고 엄청 받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사실 새로 생긴 제도라 이번 달 월급을 받아봐야 정확한 금액을 알게 될 거 같다. 그래도 20만원은 주지 않을까? 너무 희망적인가?


금전적 보상이 거의 없었을 때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시도 때도 없이 응급수술을 해왔지만 이제 조금이나마 보상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더 열심히 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돈보다 더 의욕을 돋우는 것은 결국엔 인정이다.

언젠가 사회적으로 이런 노력들이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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