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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인 Aug 16. 2023

[회고록] 엘리베이터 하극상

병원장의 엘리베이터를 뺏은 전공의

양심에 찔리는 일을 하고 나서 비판을 받으면 최소 억울하지는 않다. 그러나 선의의 행동을 했는데 비난받은 경우 마음이 매우 아프다.



전공의 4년차였을 때의 일이었다.


우리 병원 건물에는 일반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환자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다. 일반용은 누구나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로 총 6대가 있었고 그중 2개는 전층, 2개는 고층, 그리고 2개는 저층 운행을 하고 있었다. 환자용은 환자 침대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큰 엘리베이터로 총 4개, 전층 운행을 했고 주로 이송요원들이나 병원 직원들이 탔다.


어느 날 환자용 엘리베이터 4대 중 2대는 이송요원들만 직원증을 찍고 쓸 수 있도록 막아두었다. 빠른 환자 이송을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건 이해하는데 문제는 남은 환자용 엘리베이터 2대 중 1대를 지하 1층, 1층, 2층, 그리고 주차장 연결통로가 있는 4층만 운행하는 "외래용" 엘리베이터로 만들어버렸다. 취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환자들이 주차장에서 빠르게 외래로 갈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 것 같다.


'환자 침대가 들어갈 수 있는 소중한 엘리베이터인데 외래용으로 굳이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써야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첫 며칠간 별문제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내가 당직치프였던 어느 휴일이었다.


당직치프 전공의는 병동의 모든 환자들, 그리고 응급실에 오는 모든 환자들의 케어를 책임지는 존재로 후배 전공의들이 응급실이나 병동에서 일차 연락(primary call)을 받으면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해 주는 존재이다. 그리고 응급수술이 생기면 응급수술 보조를 하기 위해 들어간다.


그날 복부대동맥류 파열 환자가 응급실로 왔다. 영어로 abdominal aortic aneurysm rupture, 또는 Triple A (AAA) rupture라고도 하는데 복부대동맥이 풍선처럼 부어오르다가 결국 터진 것으로 1분 1초를 다투는 초 응급 상황이다. 보통은 대동맥류가 생기면 크기(남자 5.5cm, 여자 5.0cm), 커지는 속도, 증상 등을 보고 사전에 스텐트 삽입술을 시행하여 파열을 방지한다. 최소침습수술(minimally invasive surgery)을 사용한 치료방법을 대동맥류스텐트그라프트삽입술(EVAR ; Endovascular Aneurysmal Repair)이라고 한다.


출처:  https://www.circulationfoundation.org.uk/


그런데 이 환자는 결국 터져서 응급실로 왔고 이 경우 수술을 빠르게 받지 않으면 환자는 죽는다. 혈관외과 교수님에게 바로 연락을 하였고 한시라도 빨리 환자를 수술방에 올릴 준비를 했다.


"마취과와 수술부에 전화해서 지금 triple A rupture 환자 왔다고 바로 들어가야 한다고 해주세요. 수술 스케줄은 제가 넣었고 동의서는 지금 받도록 할게요." 당직 1년차에게 어떻게 일을 효율적으로 나눌지 지시함과 동시에 수술장에 환자가 갈 수 있도록 필요한 절차들을 처리했다. 


다행히 그때는 아무런 응급수술이 없어서 마취과와 수술간호부도 금방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까 전에 불렀던 이송요원이 올 기미가 없었다. 환자의 바이탈(활력징후 - 흔히 혈압, 맥박, 체온, 호흡수로 보며 출혈이 있는 상황에서는 혈압이 떨어지고 맥박이 증가한다)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바이탈이 흔들린다 = 환자 상태가 불안정해지고 있다.


"안 되겠다. 이송요원님 기다릴 틈이 없어. 주치의샘 저와 같이 바로 환자 옮깁시다."


주말이나 새벽에는 이송요원을 부르면 아무래도 당직 인력이 적어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급할 때는 직접 이송해야 한다고 나는 배웠다. 1년차 전공의는 나와 함께 얼떨결에 같이 환자 카트를 끌며 수술실로 올라가는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수술실은 이 건물 3층이었다.


그런데 환자침대가 들어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 4대 중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1대뿐이었다. 2대는 이송요원들만이 쓸 수 있고 남은 2대 중 1대는 수술장 3층을 가지 않는 외래 전용이었다. 환자의 활력징후를 측정하는 모니터의 알람이 다급한 상황을 알리듯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남은 엘리베이터 한 대를 애타게 노려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다른 층에 멈출 때마다 내 수명도 함께 깎이는 기분이 들었다. 손에 식은땀이 났다. "빨리 좀 가라고!!"애원하듯 소리치는 환자의 모니터를 보고 제발 조금만 버텨달라고 기도할 뿐이었다.


이 환자를 살리고자 하는 그런 장엄하고 기특한 마음보다는 그저 이 환자가 당장 지금 내 앞에서 죽으면 안 된다는 간절한 마음이 더 컸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우리는 부랴부랴 들어갔고 3층을 눌렀다. 수술실에 도착하고 응급 수술이 진행되었다. 환자는 살았다. 오늘은 별을 달지 않아도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친한 친구랑 같이 우리 병원 총무팀에 갈 일이 있었다. 친구가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 갑자기 그날 당직 때 일어났던 일이 생각이 났다.


"저기... 엘리베이터는 총무팀 관할 맞죠? 그 환자용 엘리베이터가 문제가 좀 있는 거 같은데..."

"아 그 내용은 저희 부서 말고 경영팀에서 결정된 사항이어서 그쪽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음... 마침 경영팀이 반대편 방에 있으니 친구 업무가 끝나고 같이 들렀다.


"저기요... 저 외과 전공의인데요. 환자용 엘리베이터 이번에 바뀐 게 좀 문제가 되는 것 같아서 한 번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경영팀에 있던 한 여성 직원분이 내 얘기를 듣더니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뭔가 건수를 잡은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선생님 이건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이런 내용으로 환자안전보고서를 쓰시면 이 내용으로 안건이 회의 때 올라갈 것이고 환자 안전사례를 모으는데 도움이 될 것이에요!"


환자안전보고서라는 EMR(전자의무기록) 메뉴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 번도 작성한 적은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작성할만한 문제도 없었고 이번 사건도 솔직히 약간 귀찮았다. 그럼에도 그날 나는 남은 에너지를 티끌 모아 EMR을 통해 환자안전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응급상황에서는 이송요원을 기다릴 틈 없이 의료진이 직접 환자를 이송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이번 상황에서는 다행히 환자에게 큰 피해가 가지 않았지만 추후에 문제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 해결방안으로 "외래용" 엘리베이터는 침대가 들어갈 수 있는 환자용이 아닌 일반용 엘리베이터로 변경해 주시길 바랍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환자용 엘리베이터는 이송요원과 의사직 모두가 쓸 수 있게 되었다 (이걸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외래용" 엘리베이터는 내가 제안한 대로 일반용 엘리베이터를 쓰게 되었다. 이 보고서를 쓴 것이 정확히 어떤 파급을 일으켰는지 나는 일개 전공의였기에 잘 모른다. 알고 보니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외래용으로 만드는 것은 새로 취임한 병원장님의 아이디어인데 전공의 따위가 거기에 반론을 제기한 샘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으나 뒤에서 우리 과 교수님들이 나에 대해 했던 비난들을 어찌어찌 전해 듣게 되었다. 


- 버르장머리 없게 교수랑 상의도 안 하고 보고서를 썼다.
- 병원이 하는 일에 토를 달고 있다.
- 새로 취임한 병원장님의 아이디어였는데 전공의가 건방지게 반대를 넣어서 외과가 눈치 보이게 됐다.




며칠 후 우리 1년차 전공의가 회진 돌던 외과 교수님과 함께 그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 계셨던 내과 교수님이 인사를 하셨다. 그러자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아! 그러고 보니 외과 전공의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 엘리베이터를 쓸 수 있게 되었다면서요~?"


"우리가 애를 버르장머리 없게 키워서 죄송합니다."라고 우리 과 교수님이 말했다.


"아.. 아니 나는 그냥 감사하다는 뜻이었는데." 내과 교수님은 멋쩍어하셨다고 한다. 함께 있었던 1년차 전공의는 회진이 끝나자마자 쪼르르 이 일을 곧바로 나한테 알려 바쳤다.




이 엘리베이터 얘기는 먼 훗날 내가 전공의를 졸업하고 펠로우를 졸업했는데도 몇 번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한동안 많은 회의감이 있었다. 환자 안전을 위해서 행동한 일이 비난을 받으니 사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 이후로도 전공의들이 환자안전보고서를 상관 보고 없이 작성했는데 이처럼 비난받은 적은 없었다. 믿었던 외과 선생님들이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에 상처를 받았다.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몇 선생님들만 그랬고 대부분 잘했다고 그런 얘기들은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차분하게 당시 일을 돌이켜보면 나 역시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한다. 사내 정치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당시 병원장님에게 본의 아니게 하극상을 했나 보다. 정작 병원장님은 별 생각이 없으셨을 것 같지만 언젠가 그때 병원장이셨던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씀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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