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펠로우 1년차 시절, 친한 4년차 전공의들의 당직실에서 EMR(Electronic Medical Records, 전자의무기록)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난 펠로우 1년차였지만 4년차 여자 전공의들과 친했던 터라 당직실을 나눠 쓰면서 거의 동기처럼 지냈다.
문이 쾅 열리더니 교육치프였던 김민정(가명)샘이 씩씩거리면서 들어왔다.
"아놔... 최희원(가명) 도망갔대요."
"아? 벌써 그럴 때가 되었나?" 반쯤 웃으면서 대답했다. "최희원이 지금 어느 파트예요?"
"콜론(대장항문외과)이요."
"또 콜론에서 전공의가 도망갔어요??"
"근데 거기도 억울한 게 오늘 턴체인지(turn change, 교대) 후 주치의 첫날이에요. 뭐 시작한 것도 없는데 지난달에 엔도(내분비외과)해서 그런 건지..."
내분비외과 주치의에 비해 대장항문외과 주치의는 업무량이 거의 2배다. 속으로 피식하며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납득이 갔다. 갑자기 몰린 일들이 버겁다고 느껴서 도망갔나 보다.
외과 전공의가 도망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보통 주치의 시작하고 3-4개월쯤 되면 1-2명씩 이탈자가 발생한다. 어디서 보고 배운 건지 도망갈 때는 모두 똑같은 행동을 한다. 우선 핸드폰을 끄고 연락두절이 된 채 집으로 (기숙사처럼 발각되기 쉬운 곳 말고 본가로) 돌아간다. 그럼 교수들과 특히 해당 파트 펠로우들로부터 교육치프에게 도망간 전공의를 잡아오라고 명령이 떨어진다. "교육치프"란 고참 전공의가 매월 번갈아가면서 하는 직책 중 하나인데 여러 가지 행정 업무를 총괄하며 전공의들의 대표 같은 역할을 맡는다.
"뭐야 뭐야? 김민정 왜 이렇게 빡쳐있어?" 문을 열고 미경언니(가명)가 들어왔다. 미경언니는 지금 간담췌외과 치프여서 긴 수술에 들어가 있느라 사태를 몰랐고 수술 하나 끝나고 다음 수술 시작 전에 당직실에 잠깐 쉬러 들어온 것이었다.
"최희원 도망갔대. 지금 민정샘이 잡아오려는 중."
"무슨 파트인데?"
"콜론."
"아."
"아이씨. 전화기도 꺼져있고 카톡도 안 본대요." 분노의 찬 목소리로 민정샘이 말하며 열심히 핸드폰을 두들겼다. "주치의들 시켜서 얘 본가 좀 다녀오라고 해야겠어요."
추노가 시작되었다.
교육치프는 자연스럽게 추노꾼들의 대장이 되어 추노꾼들을 모집했다. 한 명이 이탈하면 업무가 고스란히 남은 전공의들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의욕 넘치는 여러 추노꾼들이 자원을 했다. 추노대장은 사무실에 확인하여 도망간 노비의 집주소와 집번호를 받아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할 일도 많은데 갑작스러운 추노짓에 씩씩거리며 일하는 교육치프를 보고 나와 미경언니는 남의 일처럼 깔깔댔다.
바쁘게 여러 군데 전화 돌리고 있는 추노대장의 사진을 찍어 포스터에 합성해서 단톡방에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간 전공의와 연락이 되어 그녀를 어르고 달랜 후에 다시 복귀하겠다는 말을 듣고 이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추노꾼들은 서로 수고했다며 해산했다.
최근에도 전공의 한 명이 잠시(?) 도망갔다 돌아왔다. 돌아오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한다. 굳이 그때 도망갔던 일에 대해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돌아왔으면 됐다.'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다.
이제는 좀 더 트렌디하게 추노꾼 대신 D.P.라고 불러야겠다.
오늘도 각 병원의 D.P. 들은 이탈한 전공의들을 잡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