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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인 Aug 14. 2023

[수술일지] 톱니바퀴의 틈새

2023-08-10.

첫 수술은 오전 8시에 시작하고 그것을 우리는 8A(팔에이) 수술이라고 부른다.

그다음 수술은 ATF1, 그다음 수술은 ATF2 등 이렇게 표기한다. 오후 수술은 MD 또는 1P가 첫 수술이 되고 그다음 수술은 PTF1, PTF2 이렇게 쓴다. 그러나 우리 병원은 보통 오전부터 수술방을 풀가동하기 때문에 오후 수술을 따로 표기하지 않고 8A부터 ATF1, ATF2, ATF3 등 쭉 나열한다.


예시:

8A - 김ㅇㅇ - 복강경 맹장절제술
ATF1 - 박ㅇㅇ - 간절제술
ATF2 - 이ㅇㅇ - 복강경 담당절제술
ATF3 - 심ㅇㅇ - 복강경 담당절제술


그래서 수술은 맨 첫 수술만 수술시간이 정해져 있고 나머지는 추측을 할 뿐 정확히 언제 수술이 시작할지 모른다. 예를 들어 8A 복강경 맹장절제술은 대략 1시간이면 끝나는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져서 3시간이 걸리면 뒤에 있는 환자들은 앞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수술 중에는 점심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수술장 내부에 직원식당이 있는데 점심을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배식한다. 보조의(assistant)들은 남는 사람이 있으면 점심시간에 교대가 가능한 반면 집도의(operator)는 없으면 수술이 진행이 안 되니 보통 교대가 불가능하다. 그러면 수술 사이사이에 짬을 내서 밥을 먹어야 하는데 타이밍이 안 좋으면 밥을 하루종일 굶는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장시간 수술하는 중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지면 어떡하냐고 물어보는데 솔직히 물도 안 마시고 계속 뭔가에 집중해 있기에 웬만하면 화장실 가고 싶은 생각이 잘 안 든다. 그럼에도 가끔 장트러블 또는 숙취 등으로 인해 화장실에 가야 하는 경우 수술실에 있는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다녀올 수 있지만... 수술은 정신력이다. 솔직히 거의 그러는 일이 없다.




오늘 수술일정을 봤다. 내 수술은 보자... ATF4, ATF5로 배정되었네. 앞에 수술들 4개가 끝나려면 대략..... 저녁 7-8시는 되어야 내 수술들이 시작될 것 같았다....


이렇게 늦게 시작하는 이유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직 말단이라 그렇다. 보통 seniority(고참권)를 토대로 방이 배정되고 순서가 정해진다. 그런데 늦더라도 오늘 수술을 해야 하는 이유는 한 환자는 최대한 빠른 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하였고 한 명은 이미 입원 중이어서 차마 다음 주까지 기다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원래 막내 교수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었고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다 보니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낮에 좀 쉬고 저녁에 일 해야지...


오 그런데 웬걸? 우리 스케줄 전공의로부터 오후 1시쯤 연락이 왔다.


"선생님! 34번방 수술이 갑자기 취소되어서 지금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능하신가요?"


"오오 너무 좋죠~~ 준비되는 대로 환자 불러주세요."


환자들은 수술받기 전에 금식을 하는데 보통 전신마취는 8시간 금식이다. 근데 분명 저녁 7시쯤 수술이라고 했는데 아침부터 굶고 있는 이유는 간혹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어서 그렇다. 이건 사실 시스템의 문제인데 요즘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환자들이 굶는 시간을 어떻게 단축시킬 수 있는지 계속 논의 중이다.


결국 일찍 수술이 열렸고 오후 4-5시쯤 수술이 끝났다. 예상치 못한 칼퇴가 가능해졌다!


일이 일찍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 꼭 실망을 하게 된다.

차라리 포기 마음을 비우면 좋은 일들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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