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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인 Dec 15. 2023

외과의 술과 회식

옛시대의 유물 같은 문화

이 글은 개인적인 일상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적은 글로 일반화하는데 주의하여주세요.


오늘은 회식날이다.


전공의 1년차 때는 매주 1-2회의 회식이 있었다. 그땐 회식이란 무조건 필참이어서 당직이 아니면 나가야 했었고 일이 다 끝나지 않았어도 회식을 하고 나서 병원에 돌아와서 나머지 업무를 처리했었다. 그 시절엔 특별한 이유 없이 회식을 빠지면 엄청 혼났던 시절이다. 심지어 당직인데도 급한 콜이 없으면 나가야 했던 적도 있었다.


주치의가 아직 일이 남았다고 하면 술을 상대적으로 적게 주기는 했어도 술을 아예 안 마실 수는 없었다. 돌아와서 밀린 환자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데 술냄새라도 날까 봐 환자 앞에서 열심히 알코올 손세정제를 뿌린 후 동의서를 받았던 적도 있다. 요즘에는 다행히도 이런 일이 생기면 큰 파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없다.


그.래.도. 여전히 반강제적인 술 문화가 남아있다.


우리 회식의 기본적인 흐름은 다음과 같다:


1. 우선 각자의 자리에 앉고 누가 시니어인지 누가 막내인지 머릿속에 족보를 정리한다. 내가 아랫사람인 경우 주변에 앉은 각 교수님들의 자리에 수저를 놓아드리고 (이것도 고참 순서대로) 물을 채워드린다.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우선 술을 주문한다. 처음에는 각 테이블에 맥주 2병 소주 1병 정도 올려둔다. 그리고 음식을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교수님들의 맥주(또는 소주)를 받는다. 음식은 주로 고깃집에 가는데 막내는 고기를 열심히 굽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금 먹는다.


2. 슬슬 고기가 들어오면 (또는 고기가 나오기 전에라도) 어떤 교수님께서 폭탄주를 제의하신다. 그 테이블에 한 명이 맡아서 잔을 모은다. 잔을 모을 때도 섞이지 않도록 앉은자리대로 정렬하고 소주와 맥주를 적당히 따른다. 그리고 한 번 숟가락으로 탁 쳐서 거품을 낸 후 (개인기는 사람마다 다름) 테이블에 모인 인원에게 나눠준다. 그리고 지목된 한 사람이 "한 말씀""건배사"를 하고 원샷한다.


3. 위 과정을 무한반복하는 중에 큰 회식이면 슬슬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직접 움직여서 인사를 드릴 때이다. 보통 가장 고참 교수님들에게 우선적으로 인사드리는데 갈 때 소주잔과 소주 한 병을 들고 간다. 그러면 교수님께 나의 잔을 드리고 소주를 조금 따라드린다. 여기서 교수님들에게는 조금씩 드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교수님들은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인사오기 때문에 많이 드리면 힘들어서 싫어하신다. 그리고 교수님이 그 잔을 다 드시면 한 번 휴지로 잔을 쓰윽 닦고 다시 내게 건네주신 후 소주를 가득 채워주신다. 그걸 원샷한 후 교수님과 몇 마디 나눈 후 또 눈치와 타이밍을 봐서 다음 교수님으로 넘어간다.


4. 위 과정을 무한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엉뚱한 테이블에 있고 고깃집에서 식사를 시킨다고 한다. 여기까지 제정신이면 다행이다. 중간중간에 몇몇 사람들끼리 모여서 "마음 편한" 테이블에서 간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고 식사를 먹는다. 그러면서 슬슬 회식의 마무리를 알리기 위해 2번 과정을 반복하고 끝낸다.


물론 위 과정이 사람의 인원수, 장소, 멤버, 분위기 등에 따라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런 회식이 싫다. 생각해 보면 젊은 사람들 중에 이런 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리가. 즐기는 사람은 당연히 그 모임의 고참들일 것이다. 술 자체는 좋아하는데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과 맛있는 술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마시는 모임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회식에서는 술잔을 "꺾는" (술을 원샷하지 않고 잔에 남기는) 경우 꺾지 말라며 다 마시라고 강요한다. 힘들어서 술을 남기는 경우 교수님들은 큰 모욕감을 느낀다. 자신이 준 술을 다 마셔야만이 자신에 대한 충심을 증명하는 것처럼...


어느 시절부터 시작된 문화일까? 조선시대일까? 고려? 신라?


회식 후 집으로 들어가면 뭔가 아주 찜찜한 기분을 가진채 돌아간다. 술이 좀 과하게 들어가다 보면 슬슬 몇 사람들이 고삐가 풀려서 기분 나쁜 말들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너를 채용하고 싶지 않았다는 둥, 누구는 살이 쪘다는 둥, 그때 너에 대해 실망했다는 둥... 어떤 교수님은 최근 아이를 낳고 돌아온 여자 선생님 앞에서 "여자들은 애를 낳으면 업무능력이 떨어져. 바보가 돼."라는 말은 한 경우도 있다. 가끔은 기분 나쁜 말들이 전혀 없었음에도 그냥 이 모든 일들에 대한 현타가 오기도 한다.





참고로 모든 과가 이런 회식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아리 여자 후배들이랑 병원 근처에서 오랜만에 여성여성하게 파스타를 함께 먹고 있었는데 멤버는 외과 여성 2명, 이비인후과 3명, 그리고 내과 1명이었다. 어쩌다 회식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우리 동아리 때 마치 회식처럼 집행부가 테이블을 차지하고 후배들 인사 오게 시키잖아? 그때도 그런 생각했지만 정말 부질없는 짓이야. 병원 와서 사회생활하며 어차피 그 짓할 건데 학생 때만큼은 즐겁고 편하게 동아리활동하면 얼마나 좋아~"


애들이랑 같이 와인 한 잔을 하면서 말했다. 학생시절 했던 오케스트라 동아리에서 주도(술자리 법도예절)를 배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거기서 이상하게 주도를 너무 빡세게 가르쳤다. 이 시절 스토리는 나중에 좀 자세하게 써야 할 것 같은데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아랫사람은 안주를 먹는 게 금지되었고 윗사람이 마시고 비운 술잔의 레벨보다 자신의 술잔은 더 낮아야 했다. 이것을 레벨링이라고 하는데 즉 윗사람보다 더 많이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이다.


"근데 동아리에서는 맥주로 주로 마셔서 이렇게 소주잔 들고 인사드리는 건 외과에서 처음 배운 거 같아요."


후배인 희수가 덧붙였다. 그러더니 다른 후배들이 갸우뚱을 했다.


"소주잔 들고 인사요?"


그때 당시 이비인후과 전공의였던 소윤이가 물었다. 이비인후과 펠로우였던 채은이도 갸우뚱했다. 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 거 몰라? 막 한 손에 소주 한 병 그리고 한 손에 소주잔 들고 자기 잔 드리고 인사하는 거."


"저희는 사실 회식 때 술을 그렇게 마시는 편이 아니어서... 그냥 각자 마실 거 시키고 먹고 집으로 가요. 일단 회식 자체가 거의 없어요."


채은이가 설명했다.


"와! 정말 너네는 선진문화구나! 이비인후과 훌륭하다~"


"저도 전공의 때는 전혀 몰랐다가... 헤드앤넥 전공하고나서부터 배우게 되었어요."


이비인후과에서 가장 힘들고 수술이 험하다는 헤드앤넥 분과를 전공한 예진이가 허탈한 웃을 지으며 설명했다.


"역시... 빡센 수술이 문제인가. 도대체 뭐가 이런 문화를 만드는 걸까? 내과는 어때?"


함께 식사하고 있던 내과 펠로우인 예린이에게 물었다. 예린이는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꺼냈다.


"지금 제 분과에서는 회식이 별로 없기는 한데... 전공의 때 소화기내과 돌 때는 힘들었죠. 특히 간파트. 소화기내과는 유명하잖아요?"


학생 때 소화기내과에서는 유명한 "금주회"가 있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금주회 = 금요일마다 마시는 모임.


"진짜 신기한 게 우리 외과도 간담도 쪽 교수님들이 술을 제일 많이 드시는 거 같아. 왜 그럴까~? 참 신기해."





술은 어떨 때는 인간관계의 윤활제처럼 쓰일 수 있지만 과하면 독이 된다. 무엇보다 아랫사람을 "술을 잘 마시는지"보다는 그 사람의 진정성과 업무능력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여전히 곳곳에서 술자리가 강요되고 있고 술자리 참석도로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술자리는 적당히 갖고 좀 더 효율적인 조직문화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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