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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쌤 Sep 19. 2022

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만만함'이 가지는 다른 의미

"선생님, OO 이가 지금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아요"

"왜? 무슨 일 있었어?"

다정하기로는 우리 반 일등인 A가 슬며시 와서 우리 반 OO 이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상대방의 기분을 잘 살필 줄 알고 자신의 기분도 잘 말할 줄 아는 A가 참 예쁘고 한편 부럽다. 

"**이가 OO이한테 친구들이 너를 만만하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해서 OO 이가 친구들 여러 명에게 물어봤는데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만만하다고 했대요." 

"그게 왜?"

5학년 교실이다.

12살의 어린이들의 세계가 참 귀엽고 심오하다.

내가 알고 있는 **이와 OO 이는 둘 다 순하고 착한 아이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만만하다고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분명 싸우거나 시비를 거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고 대화 중에 나온 이야기일 텐데

그 말 한마디에 OO 이가 돌아다니며 친구들에게 설문하고 통계를 낸 이 상황이 왜 이리 귀엽고 학구적인지...

A의 귀띔으로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후 수업 종이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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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 OO아, 친구들이 너에게 만만하다고 해서 기분이 나빴어?

O : 네

T : 몇 명의 친구들에게 물어봤는데? 

O : (손가락으로 하나 둘 세며) 15명? 16명? 정도요

T : 그중에 몇 명이나 너에게 만만하다고 했어?

O : 반 이상이요.

T : 선생님이 진짜 잘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만만하다고 하는 게 왜 기분이 나빴어?

     뭔가 너에게 다가가기 편하다는 거 아니야?

O : 제 느낌에는 자기 아래 사람으로 본다는 느낌, 무시한다는 느낌이 좀 들었어요.

T : 아,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사실,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 아무도 나에게 장난치고 하지 않아서

    왜 나를 이렇게 어려워하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나에게 편하게 다가와 주고 만만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 (나는 왜 어릴 때부터 만만하지 않았는가... 왜 지금은 만만해졌는가)

아이들 : 선생님이 어떻게 했는데요?

T: 애들이 뭘 물어보면 '응' 하고 짧게 대답하고 뭐라고 더 말해야 할지 몰라서 별로 말을 길게 안 했던 거 같아.

아이들  : 에이~ 그게 제일 어려운데. 말 건 사람 뻘쭘해져요. 선생님 말 많은데 왜 그때는 그러신 거예요?

T: 잠깐만, 그게 포인트가 아니잖아. 대답을 한 친구들은 어떤 의미로 만만하다고 했을까? 혹시 OO 이의 설문에 응답한 사람 손 좀 들어봐~

(정확하게 16명이 손을 들었다. 쉬는 시간 10분도 안되어 16명을 설문하는 너란 녀석.. 멋짐)

(그 와중에 나한테는 왜 안 물어봤냐고 서운해하는 아이들도 있음)

그렇게 우리는 'OO 이는 만만한가?'라는 주제를 칠판에 적고 찬성과 반대 측 의견을 한 명씩 들어보았다.

우선, 가장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에게 물었다.

T : **야, 너는 왜 OO 이에게 만만하다고 이야기를 했어? ( ** : 여, OO:  남)

** : 정확하게는 여자 친구들이 대부분 너를 만만하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말한 이유는 OO 이는 장난을 걸어도 크게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는 친구이기 때문에요. 

T : 아~ 네가 말한 만만하다는 장난을 걸어도 심하게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은 친구란 뜻이구나? (찬성 쪽 칠판에 친구가 말한 만만하다를 쓴다)

T : 그럼 %는 뭐라고 했어? 

% : 저는 안 만만하다고 했어요.

T : 네가 생각한 만만하다는 어떤 의미였어?

%: 뭔가 얕잡아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OO 이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 같고 실제로 그런 친구도 아니어서 안 만만하다고 대답했지요.

T : (반대쪽에 얕잡아 보는 느낌이라고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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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6명의 아이들에게 각각 물어보고 그들의 생각을 적어보았다.

친구들의 의견을 모두 들어보니 그들이 생각하는 '만만하다'의 의미가 각각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만하다고 이야기했던 친구들은 모두 그 친구의 온화한 성격? 친화적인 성격?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렇지 않다고 말한 친구들은 '만만하다'가 내가 함부로 해도 되는 낮은 위치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OO 이는 만만한가? 


찬성 (9) : 장난이 쉽다

                 친한 친구다

                 말을 쉽게 걸 수 있다.

                 장난을 쳐도 화내지 않는다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친구에게 화를 잘 내지 않는 친구다

                

반대(7) :  얕잡아 보는 느낌이 있다.

                 낮은 위치로 보는 것 같다

                 친구의 기분이 나쁠 것 같은 단어였다

                 묻는 친구의 의도를 파악하니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OO 이는 자기에게 만만하다고 했던 친구들의 뜻을 이해하고 처음처럼 기분이 나쁘지 않게 되었고

나는 여자 친구들이 OO 이에게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OO 이가 내 생각보다 더 친구들에게 너그러운 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반 친구들은 그냥 지나갈 하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면서 내가 말하는 의도와 친구가 받아들이는 의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칠판에 격렬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자 

'왜 찍으시는 거예요?'라며 엄마에게 말하거나 신상을 드러나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

'귀엽잖아. 기억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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