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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pty Sep 22. 2022

죽음이란

보통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곤 한다. 인간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인데 죽음이 뭐 그리 쉬쉬할 것이라고 숨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영화 해리포터를 보면 죽음을 먹는 자가 있는데 그들을 보면 아주 경악을 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닌다. 이것은 관심을 끌기 위한 소위 어그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오래 살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고 다닌 이유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계속했다가는 그 친구가 나보다 더 빠른 죽음을 맞이할 것 같다는 생각에 주위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간간히 한 번씩 죽고 싶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상대방이 "그래서 오늘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물어보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나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모두 모른 척을 한다.


죽음이 그렇게 무서운가. 인간은 삶의 탄생도 삶의 죽음도 어찌 됐던 겪어야 하는 존재이기 마련인데 죽음이 뭐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존재라고 그렇게 쉬쉬하는지 원.


물론 죽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 사람들까지 묶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죽고 싶다는 것은, 빨리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것은 나의 목표이자 인생의 목표일 수도 있는 건데 그것을 일반화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다는 것이었다. 죽음이 뭐 그렇게 나쁘다고. 솔직히 벽에 똥칠하면서 사는 것보다 생을 빠르게 마감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엄마도 나를 볼 때마다 나는 오래 살고 싶지 않고 누구처럼 벽에 똥칠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늙어서 추태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고 차라리 빠르게 죽음을 맞이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혼자 결정한 죽음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스무 살 때는 스물다섯 살에 죽고 싶었다. 그런데 군대를 다녀오고 이리저리 시간을 보내다 보니 스물다섯을 맞이했다. 그래서 스물다섯에 다시 결심했다. 그래, 어찌 됐던 이렇게 살았으니 서른 살에 인생을 마감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의 신한은행 계좌 별명도 서른 살 때 떠나기라고 설정이 되었을 정도이다. 그런데 또 어쩌다 보니 서른한 살을 지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인간은 살아야 하는 삶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 나를 굉장히 위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브런치를 쓰지도 못했을 거고 이 글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죽음을 조금 더 면밀히 바라보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죽음이 그렇게 부끄럽고 무섭고 불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승에서의 삶을 본받아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에게 죽음은 정말 좋아하는 단어들 중 하나이고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궁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도 죽음이라는 것을 빨리 느끼고 싶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고 불안 작용을 한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오래 살고 싶지 않고 적당한 삶을 살다가 적당히 조용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시끄럽게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이제 살만큼 다 살았다, 고생했다 하면서 눈을 감듯이 죽음을 맞이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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