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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pty Mar 09. 2023

비가 오는 것을 기다려요.

다들 그렇겠지만 비가 오면 하나쯤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막걸리나 삼겹살에 소주 그리고 정말 슬펐던 기억들이 떠오를 것이다. 나는 유난히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비가 오는 날의 추억이나 기억이 많은 편이다. 추억은 많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이긴 하다.


나는 실제로 비가 오면 비를 맞는 것을 좋아했고 손에 무언가 들고 다니는 것을 싫어해서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비를 맞지 말아야지! 보다는 차라리 비를 맞고 집까지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걸어가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가장 기억나는 기억이 있다. 어디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작은 혜화동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싸우고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이유로 싸우고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길도 모르는 곳을 추적추적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대학로 어딘가 인지도 모를 골목길을 걸었는데 그 골목길이 참 이뻤다. 골목들과 오밀조밀한 주택들 그리고 그 사이를 아우르는 계단들에 간간이 보이는 가로등 조명까지 모든 것이 나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그 상황은 나 자신이 누군가와 다투고 기분이 좋지 않았을 때였지만 그곳을 지날 때는 싸웠는지 다투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내가 바라보는 계단과 계단에 나있는 꽃이나 잡초들이 무언가 그 분위기에 잘 어울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대학로에서 한동안 길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버스 정거장을 찾아 집으로 향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의 시간은 심야시간이었다. 다행히도 대학로에서 우리 집까지 가는 심야버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걱정 없이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니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상황을 더 좋아한다. 내가 젖지 않는 상황에서 비가 오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비가 정말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것도 좋다. 심지어는 그 폭풍우 속에 버려진 것처럼 비를 맞는 것도 좋아한다. 나는 비를 좋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근데 비가 너무 좋다. 비를 맞으면 왜인지 내가 그동안 잘못해 왔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과 느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잘못하거나 바로잡지 못한 일들을 다시 바로잡지는 못하지만 비를 맞으면 느낌상으로나마 내 잘못을 다시 되돌릴 수 있거나 내 죄를 씻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지금도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가 오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다. 2월 28일 퇴사하고 처음으로 비가 오는 것 같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나가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미칠 것 같고 미쳐버릴 것 같다. 아니 미친 것 같다. 그래도 비가 오는 것이 썩 좋다. 내 앞가림은 하지 못하더라도 비가 오는 것이 너무 좋다. 빗소리가 너무 좋고 빗소리가 가져다주는 그 향기가 너무나도 좋다. 매일 비를 맞고 싶을 정도로 비를 좋아하고 비 오는 것을 기다린다. 저 비는 언제쯤 나를 온전히 안아주고 나를 앗아갈까. 비는 나를 언제쯤 집어삼킬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고 재밌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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