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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pty Feb 11. 2024

설날인데 갈 곳이 없다.

2024년이 되었고 1월 말이라는 내 생일도 무사히 지나갔다. 그리고 찾아오는 것은 매년 새로이 다가오는 설날이다. 정확히는 설날과 명절은 21년 이후로는 아무 곳도 갈 수 없었다. 아니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내가 30대가 넘어서 이제는 친척동생들이나 결혼한 동생들의 자식들한테 세뱃돈이나 용돈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우리 가족과 친척들이 오롯이 살아있었더라면, 관계를 아직까지도 이어나갔다면 그까짓 용돈이나 세뱃돈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 간의 사랑이었다. 나에게는 그게 더 중요했다. 돈돈이 중요하다고 평생 느끼면서 살아왔는데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돈보다 대단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계기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였다.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친척들은 우리 가족을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너네 아빠를 돌봐주고 우리가 모시고 살았던 기간이 꽤 기니 3천만 원을 달라는 어이없는 상황만 이어질 뿐이었다. 그렇게 아빠가 고생해서 산 집을 매매를 하고 남은 돈으로 친척들을 3천만 원이라는 돈으로 연을 끊었고 그 이후로는 아무런 친척과 연락도 교류도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그 이후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식은 오래됐지만 내부를 리모델링한 집을 다시 구매할 수 있었고 새로 구매한 집은 기존 살고 있던 집에서 10분 거리여서 멀지도 않았고 환경 인프라도 사실 뒤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집이 조금 작아졌을 뿐이고 있었던 내 방이 사라지고 거실에서 겨우겨우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일 뿐이었다. 그리고 살고 있는 동네는 서울에서 굉장히 떨어져 있는 곳이기 때문에 강남 쪽으로만 취업을 하더라도 출퇴근 시간만 거진 2시간이 되는 상황이었어서 나는 불안했고 오히려 짜증 났다.


이 동네만 벗어나면 더 저렴한 가격과 더 넓은 집에서 살 수 있었는데 굳이 이 동네를 떠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에 아무런 반대도 하지 못했다. 그 부분은 너무 속상했다. 서울이라는 지역에 간신히 걸쳐있는 곳이지만 출퇴근을 하고 회사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지치고 힘든 곳이었다.


그렇게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난 이후부터는 설날이나 명절을 보낼  수 없었다. 그 많은 친척들과 웃으면서 교류하던 시절이 그립기는 하지만 우리를 배척했고 우리 아빠를 빌미로 잡은 인간도 못한 것들이랑 연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친척과 교류를 끊었더라도 설날은 설날이고 명절은 명절이다. 돌아오긴 하지만 결국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냥, 21년 이후로 몇 해가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아빠의 빈자리가 꽤 큰 것 같다. 2월 중에 아빠가 돌아가셨으니 감정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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