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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pty May 15. 2024

세상살이가 이리도 힘들었던가

세상살이가 이렇게나 힘든 일인가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것 같다. 세상이 더 각박해지고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으며 인류애가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모든 사람들이 힘든 시기인 것 같다. 이런 시기를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윗세대들은 어떻게 이겨냈는지 모르겠다.


당장 나의 아빠 사태만 보더라도 혼자서 네 명의 가족을 끊임없이 먹여 살렸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참 대단한 것 같다. 지금 세대보다 부모세대는 훨씬 더 각박했을 것이고 일을 따오기 위해 영업을 하고 술을 접대하고 소위 사바사바를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세상에서 어떻게 견뎌냈는지 감히 상상도 못 하겠다. 아빠의 부고소식을 들은 거래처 사장님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아빠는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했다. 키는 작았지만 무너지는 법이 없었고 가족들한테도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으니 주변 지인들을 포함한 거래처 사장님들까지도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그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홀로 버텨냈는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것 같다. 혼자서 일을 따오기 위해 아등바등 일을 하고 사업체를 차려서 사장님 소리를 들으면서 일을 했던 시기도 있었고 직원들을 두고 회사를 운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아빠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현금이 돌지 않아 직원 월급을 늦게 줄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당연히 그런 걸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 직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직원 입장에서 월급이 밀린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아빠를 상대로 신고를 하였고 그렇게 골머리를 앓다가 회사를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빠는 작은 단칸방에서 월세 25만 원을 주고 혼자 일을 했다.


몇 번이나 찾아가서 아빠 일을 도우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고 건강이 점점 더 안 좋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 나에게 이런 것 저런 것 알려주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너무나도 늦은 시간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거실 식탁에 앉아 알려주고 있었는데 처음 접하는 나로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이었다. 그것을 이해를 못 하기에 아빠에게 자꾸만 되물었고 이게 어떻게 되는 거냐고 재차 물어봤지만 아빠는 그때까지도 힘이 없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하거나 처음부터 차분히 알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라도 배우고 싶어서 하나라도 더 물어보고 또 물어봤지만 그때의 아빠 표정은 무섭지도 않았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눈으로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그렇게 아빠 일을 물려받는 것을 포기했다. 거래처라도 살려놨으면 어떻게 조금 더 희망적으로 살아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까? 아빠 혼자 2-30년 하던 일을 하루아침에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않았을까. 엄마도 그 당시에 애가 뭘 어떻게 알겠냐고 어떻게 하겠냐고 계속해서 압박을 해온 상황이라 더 배우고 싶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바다에 흘려보내듯 떠내려가게 두었다. 그래서 이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괜히 안 좋은 이미지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마음속으로만 담아두고 썩혀놔야 한다는 사실이 참 더럽고도 치사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는 하늘나라에서라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야 아빠의 빈자리가 서서히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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