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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 10 [,]

비워야 채우지

by 여백


편지를 열자마자 진한 향수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편지지에 향수 뿌렸어요?"

"네. 다 쓰고 위에 살짝 뿌렸어요"


은은한 꽃향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노인 냄새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만 내 손에도 남자 향수 냄새가 배어 버려서 살짝 신경이 쓰였다.



편지를 읽기 전 대충 눈으로 훑어보니, 검은색 잉크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여백 없이 편지지를 가득 채워 놓았다.

심지어 한 장이 아니라 총 네 장이었다. 나도 남자친구에게 두 장 이상은 써본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할 말이 이리 많을까?

빼곡하게 적힌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둘과 관련된 이야기도 물론 많았지만, 그간 내가 했던 말들에 대한 변명이나 해명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는 말이 너무 장황하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었나 보다. 본인이 사회에서나 모임에서는 똑 부러지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는 편이라며 내게도 그런 면이 느껴지도록 잘하겠다고 했다.


믿음과 관련된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사귀기 전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냐는 질문에 음악 듣고 춤춘다는 나와는 달리, 차분하게 성경책을 읽는다던 그는 나보다 훨씬 믿음이 강한 사람인 것 같았다.


편지를 잘 읽고 길게 쓰느라 고생했다고 고마움을 표했는데, 남자친구가 갑자기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다름 아닌 셀카봉이었다.


"갑자기 셀카봉을 왜 꺼내요?"

"유튜브에서 사람들이 하던 거 저도 따라 해보고 싶었어요. 같이 손 흔들면서 우리 KTX 타고 춘천가요~! 이런 거 하면 재밌잖아요"

"저기.. 여기 사람도 많고 조용히 가야 하는데 내려서하는 게 어때요?"

"네 그래요"


그는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셀카봉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남자친구는 보통의 또래 남자들과는 달리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던 것 같다. 이전에 1년 정도 연애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하던데, 과한 행동들이 마치 연애를 처음 하는 20대 초반의 남자처럼 느껴지던 터라 과연 그게 사실일까 의문이 들었다.


어찌어찌 춘천 도착했다. 바람이 정말 강하게 불었다.

평소라면 정말 예뻤을 꽃다발이 엄청난 짐이 되었다.

"그러게 꽃다발을 왜 가져왔어요 차도 없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들고 다니잖아요"


매사에 불만이 있는 것 보단 나을 수 있겠지만 무언가 고집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바람에 꽃들이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으나, 이미 가져왔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그가 짜놓은 동선대로 움직일 차례다.

첫 번째 코스는 삼악산 호수 케이블카였다.

바람이 많이 불어 케이블카 운행이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바람이 수그러들었다.

날이 추운 탓인지 사람도 많지 않아 대기도 전혀 없었다. 남자친구의 권유로 바닥이 훤히 보이는 크리스탈 캐빈을 탔고, 케이블카 안에서 음악을 들었다. 음질은 좋지 않지만 블루투스로 휴대폰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 남자친구의 시선처리가 불안했다.

"혹시 무서워요?"

"네 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아래를 못 보겠어요"

"아..."



'고소공포증이 있는데도 날 위해 크리스탈 캐빈을 탄 거야? 정말 배려심 많은 사람이네~'


내가 남자친구를 정말 많이 좋아했더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런데 나의 머릿속에선 이런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아니 고소공포증이 있으면 일반 캐빈을 타자고 하지 왜 크리스탈을 타서 즐기지도 못하고 있는 거지?'


불만족 스러웠지만, 그래도 여행을 왔으니 재밌게 즐겨야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중간에 내리니 고구마로 만든 아이스크림과 뻥튀기를 팔고 있었다. 예쁘게 인증샷을 찍고, 날이 추우니 아이스크림을 후딱 먹어 치웠다.


그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생각보다 꽤 먼 길을 달렸다. 신경을 안 쓰려고 했지만 무언가 이상해서 그에게 물으니 당일치기 여행치곤 동선이 굉장히 비효율적이었다. 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 위주로 일정을 짠 것 같았다. 일정을 변경하자고 제안했더니 이미 예약을 해서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다행히 그가 예약한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그리고 서울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했다.


클래스 사장님은 말재주가 좋은 분이셨다. 우리 둘에게 이런저런 질문도 해주시고 사진도 찍어 주셨는데,

아무래도 남자친구보다는 내가 사장님과 더 소통이 잘 되다 보니 사장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말 잘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니 원활한 티키타카에 갑자기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원데이 클래스는 나무 그릇 만들기였는데,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던 거라 어색했지만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였다.

작은 목공용 칼로 나무를 파내는 작업을 계속하는데 손이 너무 아팠다. 내가 왜 춘천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참 열심히 나무를 파고 있는데 내가 너무 힘을 세게 주었나 보다.

너무 아팠다. 무언가 이상했다.


장갑을 벗으니 오른쪽 손가락의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나있었다.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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