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우지
"사장님 혹시 연고랑 대일밴드 있어요?"
"소독약도 있을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혹시 저 같은 사람 또 있었나요?"
"사실 손이 찢어지거나 피본 사람은 없었는데 살이 많이 연하신가 봐요"
애초에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시는 걸 보니 내가 이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다음 작업부터는 조금씩 힘을 덜 주었다.
사장님은 갑작스러웠던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친구 만나면 어디서 놀아요?"
내가 먼저 답했다.
"저는 20대 때는 00에서 주로 놀았고, 요새는 친구 만나면 00에 자주 가는 것 같아요."
"그럼 남자친구 분은요?"
"저는 안 놀아요"
그 말을 듣고,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사장님과 너무 대화를 잘해서 기분이 언짢은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말로 안 놀 수도 있지만, 그게 사실이더라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옆에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사장님이 미리 알려준 대로 직접 만든 그릇에 유산지를 놓고 구입한 빵을 예쁘게 올리니 그럴듯해 보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원데이 클래스 재밌었어요?"
"네 재밌었어요. 그리고 둘이서만 데이트하다가 다른 사람이랑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새로웠어요"
"제가 사장님이랑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죠?"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구나 했어요"
정말 긍정적으로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남자친구의 얼굴에 웃음기가 점점 사라져 가는 듯했다.
그가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던,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만들었다던 그 카페에서 나오니 이전에 내린 눈이 새하얗게 쌓여 있었다.
드디어 그가 산 삼각대 겸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춥지만 사진이 잘 나오는 것 같아 정말 열심히 찍었다. 그나마 여행 중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이제 저녁을 먹기 위해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유명한 닭갈비집으로 가서 고기를 굽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기서도 그의 어설픔이 드러났다.
얇고 긴, 바싹 마른 고기를 보니 이 사람은 고기를 잘라본 적도, 구워본 적도 거의 없는 듯했다.
난 다행히도 항상 고기를 잘 굽는 남자친구들만 만났어서 주도적으로 집게를 잡은 적이 별로 없었다. 사실 대학생 때 선배 언니에게 집게를 뺏길 정도로 고기도 잘 못 굽는 편이었다.
그런데 남자친구를 보니 이 사람보다는 내가 더 잘 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위랑 집게 주세요. 제가 할게요"
아까보다 더 촉촉한 고기를 입에 넣으니 이제야 닭갈비를 먹는 것 같았다.
"고기도 구워주고 고마워요"
"저도 잘 못하는데 00 씨가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해봤어요"
고기를 다 먹고 옆 카페로 이동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었다. 카페가 하얗고 예뻐서 그가 가져온 꽃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꽃다발을 들고 열심히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꽃 들어봐요. 제가 찍어줄게요"
모델이 좋지 않아서인지, 사진구도가 잘못된 것인지 마음에 드는 사진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KTX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행 시작 전과는 달리 말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뭔가 기분이 상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물었다.
"이전 연애할 때도 여행 가본 적 있어요?"
"별로 없어요. 가도 다 당일치기로만 갔고, 해외는 가본 적이 없어요. 전 사실 여행을 왜 가는지 이해를 못 하는 편이긴 해요."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견문도 넓힐 수 있고 힐링도 할 수 있다는 나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당장 집 앞 신호등만 건너도 새로운 것 투성이라 생각해요"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난 굳이 그의 생각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 그를 존중해 주며 말을 아꼈다.
남자친구는 돌아오는 열차 안,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 내내 무표정을 유지했다.
냉담함을 느끼고 기분을 풀어보려는 나의 노력은 그를 둘러싼 차가운 얼음벽에 모두 튕겨져 나갔다.
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