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신형철은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 서평에서 말한다. “애초 섬뜩한 대상들을 택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상잡사를 서서히 섬뜩한 것으로 바꿔나가는 서사의 조율 능력이 탁월하다. 방법론의 이같은 변화를 ‘악몽의 일상화’에서 ‘일상의 악몽화’로의 변화라 부를 수 있을까. 이 변화는 명백히 진화다. 이 진화 덕분에 2000년대 작가군에서도 이 작가의 존재는 각별해진 듯 보인다.『몰락의 에티카, 677p, 문학동네, 2019』”
편혜영은 2000년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이슬 털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기대되는 작가에서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는 듯 보인다. 2014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편혜영은 “나는 늘 무엇인가를 지켜보고 바라보고 생각했다. 대부분은 최선을 다해 오해했다. 오해한 것을 썼고, 그것을 진심으로 이해받았다.(『이상 문학 작품집』, 61p, 문학사상, 2014)” 라고 그녀의 수상소감에서 밝히고 있다. 그녀의 작품이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몬순』은 소통이 단절된 부부의 이야기다. 소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왜 겉돌며 어색한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남편 태오는 이웃의 관심이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그는 우연히 ‘댄스’라는 바에서 아내 유진의 직장 상사인 관장을 만나게 되고 숨겨져 있던 단서가 하나씩 풀린다. 여기에 새로운 의심이 더해지며, 독자는 태오와 유진의 결말을 긴장감 있게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몬순 같은 거요. 그렇게 규모가 큰 바람은 언제 방향을 바꾸는지, 그 순간을 미리 알 수는 없는지, 그런 건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그런 거에 대해 잘 압니까?(28p)
영문학을 전공한 과학관 관장이 태오에게 하는 말이다. 태오와 유진은 자신들에게 닥칠 불행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두 사람은 불안해하고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있을 뿐이다. 태오는 아이를 잃은 후, “아이가 생긴 것을 두고 유진은 실수라고 했다. 단 한 번 그렇게 말했지만 태오는 잊지 않고 있었다.(20p)" 라며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유진 때문에 고통스러워 보인다. 유진은 “태오가 돌아오면 유진은 늘 방에 틀어박혔다. 방문을 잠가놓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닫힌 문은 명백히 금지를 나타냈고 매번 태오의 기분을 거슬렸다.”처럼 태오를 피하며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 한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 올지 모르는 불행 때문에 두렵다. 그것이 불행이 찾아오면 책임의 소재를 찾아 상대에게 떠넘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비할 수 있는 불행이란 없지 않을까. 나만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모두가 상처 때문에 눈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불행은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유진 씨도 그렇게 말하는 쪽이에요. ‘증명할 수 없는 건 무용합니다.’ 단호하죠. 그래도 꼭 덧붙여 말했어요. ‘그렇지만 세상에는 그런 일 천지예요. 확실한 걸로 증명되는 건 없어요.‘(25p)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관장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아이러니해 보인다. 관장은 태오가 아내와의 외도를 의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태오는 증명되지 않는 의심들 때문에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삶의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불안해한다. ‘아내는 왜 그 날 아이를 혼자 두고 나간 것일까?’, ‘아내는 왜 그 날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까?’,‘아이는 왜 내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숨 쉬는 게 느껴졌는데, 갑자기 죽어버린 것일까?’ 태오는 단전이 돼 깜깜해진 아파트에서 빠져 나와 차마 유진에게 묻지 못하는 질문을 혼자 읊조리며, 외로워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두워진 아파트 보다 태오의 마음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앞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태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자신에게 꾹꾹 숨겨 놓았던 질문, ‘나 때문에 아이가 죽었던 것은 아닐까?’ 이것 때문에 다른 모든 질문을 유진에게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에 대한 의심 말이다.
태오가 조금 더 시간을 끌어볼 작정으로 물러서는데 아파트가 다시 어두워졌다.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주저하듯 불이 켜졌다. 다시 불이 꺼지고, 켜졌다. 예고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몇 번인가 그런 일이 더 일어났다. (34p)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 작가는 기존의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인 아파트를 단전으로 인해 어둡고 컴컴해진 아파트로 설정해 무겁고 차가운 공간으로 인식하게 한다. 깊은 어둠 속에서 혼자 온몸으로 감내하는 유진의 비극은 우리의 영혼까지 잠식해 들어오는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태오는 불 켜진 아파트에 주춤하다 불이 다시 꺼졌을 때, 아파트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태오에게는 불 켜진 아파트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마주해야 하는 절대적 두려움의 공간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점멸하는 아파트 불빛 속에서 태오의 결정이 궁금해진다. 작가는 야속하게도 결말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편혜영의 『몬순』은 종종 문학 작품들에서 보이는 ‘그냥’이 없어 보인다. 간혹 문학 작품에서 ‘그냥’ 그려진 풍경이나 주인공들의 말들은 독자에게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편혜영의 작품 『몬순』은 치밀한 계산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 믿어진다. 제목이 ‘몬순’인 것도, 관장이 영문학도이면서 과학관 관장인 이유도, 유리창 사건도, 태오와 관장이 ‘댄스’에서 만나는 것도. 심지어 잘생기고 어여쁜 아내와 자식을 둔 의사마저도. 탄탄한 구성은 덧셈, 뺄셈으로 결말에서 독자를 납득시키고 만다. 단문으로 떨어지는 문장은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 작품에 속도감을 주고 긴장감을 부여해 끝까지 이야기를 따라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갑자기 찾아 온 불행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우리네 삶의 무게가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편혜영의 작가로서의 존재감이 2019년 김유정 문학상 수상자라는 영광을 안겨준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