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평론가는 한강 작가를 가리켜 작가가 소재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소재가 작가를 선택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신형철의 말처럼 <소년이 온다>의 5.18 광주 이야기가, <작별하지 않는다>의 4.3 항쟁 이야기가 한강 작가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프롤로그에 처음 등장하는 꿈같은 장면은 느린 몽타주처럼 펼쳐지며 작품의 서문을 연다. 그리고 나를 압도한다. 바다로 떠밀려가는 뼈들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까?
경하는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고 서울에서 제주로 향한다. 경하는 인선이 키우던 새, 아미를 구하기 위해 눈보라를 맞으며, 눈 쌓인 산 길 위에서 긁히고 찢기며, 발이 언 채로 인선의 집에 도착한다. 하지만 이미 아미는 죽어 있다. 무리한 부탁인줄 알면서도 인선은 경하에게 부탁을 했고 말도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경하는 아미를 구하러 어둠을 헤치고 눈보라를 뚫고 갔다. 경하는 할 수만 있다면 죽은 아미의 부리에 대고 숨이라도 불어 넣어주고 싶었을 거다. 아미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경하는 아미의 몸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통에 넣어 눈으로 언 땅을 힘겹게 판 후, 묻어준다. 그런데 아미가 다시 살아나 경하의 주위를 날아다닌다. 아미는 죽었지만 살아 있다. 경하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아미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된다. 4.3은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미를 외면할 수가 없다. 4.3을 회피할 수 없게 된다. 마주하게 된다.
서울에 있는 인선은 잘린 두 손가락을 접합하는 수술을 했다. 잘려서 죽어 있던 신경은 수술로 다시 이어졌다. 죽은 신경을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몇 초마다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주어야 한다. 칼에 베이는 고통, 그 고통을 참아야 신경이 산다. 깨어있게 하기 위해서는 지독한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 인선이 자신의 잘린 두 손가락을 되찾기 위해 참아내야 하는 고통의 시간 만큼이나 4.3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신경이 되살아난다. 그래야 4.3의 이야기가 죽지 않고 지금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는 자꾸 까먹는다. 자꾸 잊혀진다. 눈 앞에 있어야 한 번 더 돌아보고 한 번 더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게 죽은 아미가 살아 있고 죽은 손가락 신경 세포를 계속 바늘로 찌르는 이유가 아닐까.
사람은 어리석다. 인선은 엄마가 죽고서야 엄마를 이해한다. 엄마가 시체를 찾지 못한 외삼촌을 평생 동안 찾아 헤맸던 이유를,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빠를 못생겼다고 놀렸던 일은 엄마의 가슴에 상처로 새겨졌을 것이다. 죽은 사람으로 치라는 이모의 말은 아마도 인선의 엄마를 위한 말이었을 것이다. 인선에게 외삼촌이 죽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인선 엄마의 삶이 지옥이 되리라는 것을 이모는 알았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인선 엄마에게 외삼촌은 죽은 사람이 되지 못 했다.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절대 작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외삼촌을 평생을 찾아다닌 건 의무가 아니었다. 오롯이, 사랑이었다. 인선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경하에게 아미를 부탁한다. 아미가 간절히 살아있길 바라면서. 죽음을 꿈꿨던 경하는 죽었으면서도 날아다니는 아미를 보며, 인선과 함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끝맺지 못한 다큐의 끝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마음에 품은 경하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목도하고 새로운 시작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한강은 이 소설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냐고 말이다. 나에게 묻는다. 너는 사랑할 준비가 되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