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맑음 ³
이불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 고등학생이 된 후 생긴 습관이자 일상이었다. 잠든 아빠의 배를 덮은 이불이 반복적으로 잘 오르내리고 있는지를 숨죽이고 바라보던 밤. 아빠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이라며 이불이 주던 확답만이, 두려운 불안에서 나를 꺼내주는 조용한 안도였다.
거액의 빚을 만들고 도망간 엄마. 아빠는 안방이 없어졌고, 나는 내 방이 없어졌다. 현관은 신발장은커녕 다시 발을 디딜 틈도 없이 좁아졌고 제법 모양새를 갖추었던 거실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집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방 하나. 우리 집보다 우리 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아주 작은 싱크대와 그만큼 작은 화장실만 겨우 붙어있던 단칸방. 그곳은 서로만이 유일한 가족이 된 아빠와 내가 정을 붙여야 할 보금자리였다.
'우리 방'에는 세탁실이 따로 없었다. 세탁기는 바깥으로 쫓겨났다. 사람이 잘 곳도 겨우인데 세탁기가 지낼 곳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빈 공간에 자리 잡은 세탁기는, 본업을 하지 않을 땐 택배 상자 역할을 했다. '대문 가장 안쪽 집 앞 세탁기 안.' 이따금 필요한 물건을 택배로 주문할 때마다 주소지에 써넣는 문구였다. 세탁기의 본업은 여름보다 겨울이 고역이었다. 세탁기에 물을 넣어주는 수도꼭지가 낮은 온도에 꽁꽁 얼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한겨울의 세탁을 위해서는 세탁기에게 가기 전에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끓이는 것이 먼저였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 수도꼭지 위로 뜨거운 물을 살살 부어 밤새 얼어버린 수도관을 어르고 달래 녹여준다. 덜 추운 날엔 금세 꾸룩꾸룩 소리를 내며 호스를 타고 세탁기 안으로 물이 쏟아졌지만, 추위가 매서운 날에는 같은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추위가 기승이었던 겨울.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수술 안 할랍니다. 몇 년 살다 죽더라도 그냥 인간답게 살다 죽는 게 낫지."
아빠가 입원했다. 가볍게 검사를 하려고 갔던 집 근처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진단을 받았다. 며칠 뒤 입원한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 결과를 들은 아빠가 평소 돈독하게 지내던 선배와 병원 비상계단에서 하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나는 문 뒤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야 인마, 그래도 네 딸이 아직 고등학생인데 그게 무슨 말이야. 수술은 해야지."
"그러고 어떻게 평생을 살아요. 내가 어떻게 살아."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던 그날. 아빠에게 도움이 아니라 짐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날. 이 정도면 다 컸다고 생각했던 열일곱 살의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아빠는 강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세고 성격이 불같았다. 체구가 작아도 깔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단 있고 멋진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홀로 나를 키우며 엄마의 빈자리까지 채워 사랑을 주었던.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친구 같던. 아빠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고,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빠가 무너지고 있었다. 병명은 직장암. 아빠는 병에 관한 것 대부분을 내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빠가 암에 걸렸다는 것. 수술하지 않으면 몇 년 살지 못 하고 죽게 되리라는 것. 수술하게 된다면 '장루'라고 하는 인공항문을 배로 꺼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 수술 후에는 평생 배변 주머니를 배에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 수술 후에도 몇 년을 살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 한다는 것. 몇 년을 살든 인간답게 살다 가고 싶다고 했던 아빠의 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현실들이 순식간에 내 앞에 쏟아졌다.
"그냥 여기서 유리창 깨고 확 뛰어내릴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비상계단의 커다란 통유리창을 보며 울부짖듯 고통스러운 마음을 뱉어내던 아빠는, 결국 수술을 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아빠가 죽으면 혼자 남겨질 어린 딸. 나 때문이었다.
"내가 똑똑하지 않아서, 의사가 못 돼서 미안해."
수술실로 들어가는 침대 위 아빠의 손을 잡고 나는 바보 같은 사과를 했다. 사실은 고작 나 때문에 수술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아빠의 자유를, 아빠가 생각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는데. 우리 딸 철들었네, 하고 웃는 아빠의 얼굴을 보니 바보 같은 말을 내뱉는 것이 겨우였다. 이대로 수술실로 들어간 아빠가 다시 웃으면서 나오지 못 하면 어쩌지. 그 생각만으로도 아빠의 부재가 너무 두려워서, 하고 싶은 사과를, 해야 했을 사과를, 할 수 없었다. 수술한다는 선택을 해주어 고맙다는 말도 당연히 할 수 없었다. 아빠의 미래를 내가 앗아간 것만 같았다.
죽음이 코앞에서 간이라도 보듯 왔다갔다. 수술실 앞에서 아빠에게 줄 쿠션을 끌어안고 전광판에 찍힌 이름만 계속해서 확인했다. 8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 했던 수술은 9시간이 지나고 10시간이 더 지나서야 끝이 났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아빠의 얼굴이 너무 핼쑥하고 하얘서, 마취 탓에 감고 있는 저 눈이 다신 떠지지 않을까 봐 눈물이 줄줄 났다.
"환자분이 깨시면 목이 마르다며 물을 달라고 하실 거예요. 그래도 오늘은 절대 주시면 안 되고, 거즈에 물을 묻혀서 입 주변을 적시듯 닦아만 주세요."
이동하는 아빠의 침대에서 눈을 못 떼던 교복 차림의 어린 보호자에게 간호사는 달래듯 말했다. 물을 주면 안 된다. 입 주변을 적신 거즈로 닦아준다. 간호사의 말을 되뇌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할 수 있는 걸 하자. 죽음의 문턱을 겨우 넘어온 아빠에게,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것을 하자.
아빠의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는 담당 교수님과 만난 적이 없고 모든 소통은 아빠가 했다. 병원비가 얼마나 들었는지 앞으로 몇 번의 항암치료를 하고 어떤 때에 병원을 오고 얼마 만에 한 번씩 검사를 해야 하는지.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아빠에게 묻지 못 했다. 수술 후 극도로 예민해진 아빠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오전 수업만 듣고 오후에는 병원으로 하교했다. 밤에는 병실 간이침대에서 자고 다시 일어나 병원에서 등교했다. 그런 생활이 2주 정도 지속되었던 어느 날 아침. 등교를 위해 탄 엘리베이터에는 아주머니 두 분이 먼저 타고 계셨다.
"우리 애 이제 고작 세 살인데. 이제 고작 세 살인데......."
얼마나 울었는지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 부르던 아주머니는 다른 아주머니의 품에서 무너질 듯 한참을 우셨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코앞에서 봐야 하는 부모의 마음을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밑으로. 밑으로.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그 공간이 한없이 땅으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아빠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기간은 한 달 남짓. 그 한 달 동안 수많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만났다.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이들의 곁에서, 함께 죽음과 싸우는 일을 하는 사람들. 죽음을 마주하는 당사자와 그들의 가족. 모두가 다 용기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 나약하지도 않았지만, 모두의 바람은 같았다. 살고 싶다. 살고 싶었다. 살리고 싶다. 살리고 싶었다.
죽음과 싸워 얻어낸 새로운 삶은, 사실 아빠에게는 죽음에게 지는 것보다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존심도 존엄성도 바닥에 떨어졌다는 생각에 자신을 스스로 좀먹고 서서히 무너지던 나의 유일한 가족. 단 한 번도 죽음에 대해 말을 꺼낸 적 없던 아빠는 밥 먹듯이 죽어버리겠다고 말했다. 네가 그냥 나와 같이 죽겠냐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버텨야만 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아빠를 살게 한 것이 다름 아닌 나였기에. 아빠가 죽음과 싸우게 만든 시작이, 어린 나였기에.
코앞까지 찾아왔다 발을 돌렸던 그 죽음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만들어낸 나의 습관. 열여덟이 되고 열아홉이 되던 해에도 나는, 여전히 아빠의 배를 덮은 이불자락을 확인했다. 밤이면 밤마다. 조용히. 숨죽여서. 또 그 죽음이라는 놈과 아빠가 마주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