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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Apr 30. 2018

헐리우드판 이데올로기

영화 <어벤져스-인피니티워>를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기술은 알파고에 필적한다. 그는 빨간망토를 두르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장밋빛 미래를 온몸으로 선전하고 있다. 스트레인지와 아이언맨은 속편에서 지구를 구할 것이다(사실 누가 구하든 무관하다. 그가 예측한 결말로 향하는 것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이것말고는 이 영화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시신경이 폭발할듯 황홀한 전쟁 포르노이다. 실제 전장은 물론 백인들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흑인/제3세계인들의 거주지여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9.11테러 이후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그로 인해 발발한, 이라크와 시리아의 내전을 은연 중에 정당화하는 이 영화의 방식이다. 여기서 예술은 완벽히 정치화되었으며, 시종일관 지속되는 강렬한 스펙터클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프로파간다(선전물)일 뿐이다. <어벤져스>를 감상한 관객은 스펙터클을 대하는 방식으로 미디어에 비춰지는 중동지역 내의 참상을 '소비'하게 되며, 스펙터클의 시각적 쾌감에 동의함으로써 그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실천'한 뒤 결국에는 이 영화의 궁극적인 메시지인 "거기 가만히 있으라"에 복종한다.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 지구인들은 안전해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은 지금 이 시각에도 중동에서는 수백 명의 사상자와 난민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벤져스>의 진정한 적수는 오히려 '타노스' 같은 마초가 아니라, 백면서생의 다음과 같은 문장일 것이다.

"예술은 행해지게 하라,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라고 말하는 파시즘은 기술에 의해 변화된 감각 지각의 예술적 만족을-마리네티가 고백하듯이-전쟁에서 기대한다.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완성임이 분명하다. 일찍이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올림포스 신들의 구경거리였던 인류는 이제 자기 자신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인류의 자기소외는 인류 자신의 절멸을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게 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탐미주의화이다.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파시즘에 응수한다.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신우승 옮김, 2016 전기가오리, p.38-9)

*실제로도 카메라가 지구에서 머무는 유일한 곳은 9.11 테러가 발생한 뉴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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