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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Oct 15. 2019

독심



“너의 마음을 읽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너와 멀어졌다”라는 첫 문장을 보자. 마음을 읽어서 너와 멀어진 상황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는 일반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달리 말해서, 읽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행동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종류의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벼운 인사나 상호 간의 선물교환처럼 사회적으로 규정된 상호작용 의례, 즉 상징적인 제스처다. 제약이 자유를 가능케한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법이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이 시가 특수한 상황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말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시는, 문학은 현실과는 달리 일반적인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특수성을 매개로, 일반성에 구멍을 내는 방식으로 독자를 환기한다. 즉 사회적 통념을 위반하는 어떤 상황에서 이 시는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연에서 “의지”라는 단어가 나온다. 의지란 무엇인가? 의지意志는 의욕意欲과는 다른 것이다. 의지가 정신적이라면 의욕은 육체적이다. 그러나 “의지가 아닌 것들과 화해”하려는 나의 시도는 7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실패로 끝난다. 즉 “날씨가 급하게 바뀌었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3연에서 밝혀지는데 “낯선 발음으로 부정하는 말”을 하는 너와, “국적도 인종도 달라진” 상황에 놓인 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너와 다른 언어를 쓰는 내가 어떻게 너의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이 지점에서는 ‘읽다’의 통상적인 의미마저 뒤바뀌는 듯하다.

‘읽다’라는 동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앞에서 나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었다는 믿음 없이는 우리가 행동할 수 없다고 썼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는 일반언어뿐만 아니라 상징언어, 즉 사회적으로 규정된 상호 간의 제스처라고도 썼다. 만일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타자(상대방)와 나는 적대관계에 놓일 것이다. 즉, 말은 그것이 없었다면 적대적일 너와 나를 “화해”시키는 도구이다. 상대방은 당연히 “나의 의지”가 아닌데, 그것은 인간 정신이 일종의 폐쇄적인 자기 원환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소유권'이라는 낱말을 떠올려보라). 그리하여 1연에서 내가 너의 마음을 읽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독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너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에 너와 멀어진 것이 아니라, 읽었다고 내가 판단했기 때문에 멀어진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너”는 대체 누구인가? 2연의 “먼 도시의 우연한 사고”와 7연의 “내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달려온 자동차가.....”라는 부분은 나와 멀어진 “너”가 다름아닌 “나”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 시는 '나는 너다'라는 불교적 가르침을 품고 있다고 해석하면 될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4연과 5연을 보면 이러한 해석은 제 발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너는 비 내리는 거리도 아니고 상하이의 교통사고도 아니며 거기 중국집 아니냐고 묻는 한밤의 전화도 아니다.” 여기에서 세 번 반복되는 “아니다”라는 동사에 주목하도록 하자. “너”는 부정의 형식으로만 말해지는 어떤 것이다. “너”는 부정신학에서 ‘~이 아니다’라는 형태로 임재하는 신과도 같다. 유대교의 신은 긍정(정의)될 수 없는데, 형상이 없는 무한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로 다음 연에서 “나는 식물들을 모르고(...) 모르고 (...) 무지”한 자가 된다. 즉 “너”(신) 앞에서 “나”는 무지한 자일 뿐이다.

이제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신, 즉 말씀(로고스logos) 그 자체에 해당하는 법 앞에서 “수긍하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아브라함의 목소리(“독한 목소리”)인 동시에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니체의 그 “고독한” 목소리로 시편 내부에서 울려퍼진다. 공동체적인 일반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두 목소리의 지류는 같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는 범죄행위라고 적으며, 공동체적 윤리를 초월하는 ‘목숨을 건 도약’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고 해석한다. 믿음이란 이처럼 ‘일반성-개별성’으로부터 ‘보편성-단독성’으로의 도약이다. 그것은 (헤겔식의) ‘매개’가 아니라 일종의 ‘단락段落’에 의한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카뮈가 <시지프스 신화>에서 말한 그 실존적 자살, 자기가 속한 뿌리(본질, 공동체, 모국어)로부터 잘려나간, 이방인의 단독성 그 자체를 표식한다.

하지만 문학은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독심>을 읽고 해석할 때, 나는 이 시와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진다. 내가 이 작품을 다 안다고 판단할 때, 그리하여 시적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순간에, 나는 이 작품을 단독자가 아닌 개별자로서 파악하는 것이며, 텍스트를 거대한 ‘담론장’ 속으로, 일상어의 ‘맥락’ 속으로 용해시킴으로써, 작품 그 자체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만일 해석에 의존해서 낱낱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작품이 아니다. 비평적 조감도는, 문학의 공간이 지팡이에 의존해서 걸어가야만 하는, 눈먼 자의 그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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