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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May 23. 2017

아무도 아닌

소설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이 소설집에서 몇 안 되는 행복한 결말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편은 아내를 잃음으로써 아내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죽은 아이는 그들의 사랑의 보증인이기도 했습니다(아이=사랑). 외국여행은 남편이 잃어버린 아이의 진정한 '의미'를 확인하는 동시에, 상실감을 회복하는 애도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슬픔과 우울은 다릅니다. 슬픔은 애도를 통해 대상에 대한 상실감을 회복하는 '과정'인 반면, 우울은 상실감이 우리들 내면에 '고착화된 상태'입니다(그래서 슬픔은 끝이 있지만 우울은 끝이 없어요). 애도를 통해 우울에서 벗어나려면 상실된 대상의 의미를 우리가 재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죽었을 때 아내에 대한 사랑도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열차칸에 그녀를 떠나보낸 뒤에야 남편이 깨달은 것처럼요.


아이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법적 매개물인 동시에 부성과 모성이라는 차이를 유지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의 사랑의 기반인, 가족 내부의 성차와 결혼이라는 법적 '결속력'을 매개하는 것이 아이죠(우리나라의 경우, 간통법이 폐지된 이후로 이러한 상관관계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즉 사랑이라는 종교의 최종 수호자는 동반자나 연인이 아닌 바로 아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모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가 부모를 낳습니다.

 

이 신성한 아이가 상실된다면, 두 사람의 사랑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집니다. 바로 죄의식의 형태로 말입니다. 아이의 죽음에 대한 부모의 책임, 바로 이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무너뜨렸던 것 같습니다. 아내는 남편에 의해 시종일관 철없는 아이로 묘사되는데요. 아내가 아이의 일화를 회상해도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죠. 죄의식이 그로부터 아내에게 전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조금 더 들어가 보자. 그렇게 제안한 것은 그녀였다."p.154).


따라서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진정으로 상실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두 번 잃어야 합니다. 이 소설에서 남편은 아이를 잃기 위해서 아이로 묘사되는 아내를 잃어야 했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잃음으로써 아내(에 대한 사랑)를 잃었다면, 아내를 잃음으로써 아이(에 대한 죄의식)를 잃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을 이 소설은 증명해 냅니다. 아내가 잃어버린 패스포트가 상징하는 바는 바로 산 자(남편)와 죽은 자(아이)를 매개하는 '죄의식'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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