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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Mar 14. 2017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도 푸르게 하지 못한다.

잠언집

천국에는 희망이 없다.

좋은 관계란 서로를 변화시키면서, 변화되는 관계이다.

너를 슬프게 하는 것은 너 자신의 교만이다.

꽃은 불안하지 않다. 꽃은 슬프지 않다. 꽃에게는 그 자신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쁨을 쉬이 고통으로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물고기는 울지 않는다.

너의 고통과 불안은 너 자신을 높이려는 데서 온다. 기쁨은 언제나 낮게, 낮게 찾아온다. 너 자신을 연기처럼 낮게 내릴 때, 네가 발 딛고 있는 대지는 기쁨일 것이다.

삶은 구조를 세우는 것이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허약한 우리 삶의 구조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슬픔은 우리의 조급함에서 오는 것이다.

여기 아직 기쁨은 있다. 다만 네 스스로 고통에 집착함으로써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미나리꽝의 베어진 풀꽃들의 아름다움. 누추함과 아름다움이 어찌 둘이겠는가. 또한 어찌 하나이겠는가.

상처의 상처다움은 '돌이킬 수 없음'에 있다.

한 사람의 상처는 모든 사람의 상처다.

잊어야 할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만 잊힐 수 있다.

상처는 죽음의 삶이고, 망각은 삶의 죽음이다.

모든 것은 현실 안에 있다. 현실을 떠나 보물찾기하는 일의 어리석음!

자기를 믿을 수 없을 때 남을 불신한다.

모든 것이 더럽혀졌을 때 하나 남은 것이라도 가꾸어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지만, 그 하나 남은 것을 가꾸는 일 또한 더렵혀진 다른 것들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일 수 있다.

우리의 고뇌는 신의 출현방식이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고통의 응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마치 전압이 극도로 오르면 퓨즈가 끊어지듯이.

지금, 여기서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지금, 여기-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의 부정. 행복은 부정을 '통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으로서' 존재한다.

하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자세하게 적자. 나는 내가 살아온 하늘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것이다. 나의 하늘이 너의 하늘을 짓눌렀다는 것까지.

본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무심결에 나자빠진다.

사랑이 없는 곳에 지옥도 없다.

누군가 이것을 불행 혹은 상처라고 얘기했을 때, 이미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 상처는 얘기될 수 없는 것이고, 상처가 파악되었을 때는 망각이 전신을 휩싼다.

모든 이념의 이념성은 자기의 옳음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데 있다.

질문만이 열린 '해답'일 수 있다.

질문-칼끝. 의미와 우연을 도려내고 영원히 푸른 깃발을 꽂는 것. 너는 더 깊이 찔리기 위해 질문을 향해 달려든다.

우리의 비극은 우리가 세계에 준 관념을 세계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해는 오해의 일종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만을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은 앎이다. 항상 열려 있기를! 인식은 행위의 처음이요 끝이다.

사랑은 환상의 반대편에 있다. 사랑-환상이라는 얼어붙은 호수를 가르는, 카프카의 도끼날.

그는 병이다. 그는 말한다-아프다는 것은 건강함의 징조다.

그는 평생 동안 괭이로 땅을 판다. 그가 죽으면 사람들이 그곳에 그를 묻으리라.

괴로움의 끝에 늙음이 온다. 네가 청춘이라 부르던 것른 늙음의 껍질이었다.

사랑의 방법을 찾는 것은 이미 사랑에 대한 배반이다.

절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임의의 절망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마치 산불을 끄기 위해 맞불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즉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러, 세계의 사리(舍利)를 얻어내는 일.

사람의 어리석음을 사랑하되, 용서하지는 말 것!

삶은 아무것도 속이지 않는다. 정직하게 시간의 칼을 휘두르며, 자기의 변화를 완성할 뿐.

사람이 사람답게 죽지 못했을 때, 그것을 개죽음이라 한다. 그러나 개는 왜 개같이 죽어야 하는지... 개가 개같이 죽는 한, 사람이 사람답게 죽을 가능성은 없다. 개죽음으로서의 구원.

천국은 지옥의 부분집합일 뿐이다.

사랑, 시간, 우연, 허무는 각기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관찰하려 하면 벌써 자세가 생긴다. 순수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시대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자아의 귀족주의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언제부터 인간이 그렇게 고상해졌는가. 우리가 고상해진 뒤부터 우리의 고통도 감미로워졌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귀족주의를 자아에서 제거할 때 우리의 불행도 기운을 잃을 것이다.

나무는 초록에서 빨강으로 건너간다. 혹은, 나무는 빨강에서 초록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용서는 저버림, 혹은 내팽개침의 미화적 표현이다.

혼신(渾身)-그것은 이미 정신이다. 정신이 아니라, 이미 육신이다.

혼신은 죽음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죽음을 인식하는 정신이 육체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하다. 상처받지 않을 만큼 위독하다.

죽을 수 있는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조건이며, 테두리이다. 죽음은 삶의 입이다. 삶은 죽음의 입을 통해 말한다.

부끄러움이 없을 때, 비로소 부러움이 없다.

이 삶의 유일한 원칙인 기다림-절망은 기다림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퇴폐란 절망이 아니라, 기다림의 포기이다.

절망함로써 초월한다. 또는 절망, 그것은 이미 초월이다. 절망하는 순간만 초월할 수 있다.

고독은 가장 비겁하지만, 가장 확실한 자기 방어의 방법이다.

마음을 기대놓으면 곧이어 썩는 냄새가 풍긴다.

절망은 '바닥없음'으로서만 절망일 수 있다.

나의 행복은 행복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전적인 망각이다.

추함이란 자기를 열어젖히는 것이다. 속옷까지 벗어부치는 것을 무슨 자랑으로 아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친구가 아니다.

현실을 터부시하는 것은 꿈을 터부시하는 것이다.

절망은 치유할 수 없는 죄다. 그것이 게으름과 무감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뚫리지 않는 벽만큼 단단한, 뚫으리라는 희망, 그 희망을 저버리는 것이 퇴폐다.

희망, 그것은 절망의 반대가 아니라, 퇴폐의 대립항이다.

희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벼랑 끝에 서본 사람 외에는... 희망은 맹목적인 의지나 신념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깨어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이다.

희망은 삶에서만 생겨난다. 삶은 희망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절망의 얼굴과 절망의 목소리로 터져나오는 희망이다.

절망과 희망의 하나됨은 우리가 중독된 삶으로부터 깨어나는 순간에만 이루어질 것이다. 중독은 퇴폐다.

퇴폐는 악(惡)에서와 마찬가지로 선(善)에서도. 타락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게으른 도덕주의자는 고뇌하는 악인 이상으로 퇴폐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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