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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Jun 30. 2016

<사피엔스>를 읽고  

인문#01

https://www.youtube.com/watch?v=2wLp3krIa_o





<세계지성에게 묻는다 : 문명전환과 아시아의 미래-"인류에게 미래는 있는가?">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 (16.4.27)
패널: 김민웅(경희대 미래문명원 원장), 김윤정(?), 이택광(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안병진(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


유발 하라리 잘 생겼던데요. 몸매도 슬림한 데다 얼굴도 실물이 훨씬 낫고.
그 사람이 쓴 텍스트가 그 사람의 이목구비를 재배치하는 경우가 있어요. 생긴 것은 별 볼일 없는 것 같은데 작가나 학자라는 이유만으로 뭔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만일 <사피엔스>를 읽지 않고 하라리를 만났다면 그냥 머리 벗겨진 이슬람인이구나, 하고 (아니,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냥 스윽 지나쳤을지도 모르고
거의 무감각했겠지요. 그런데 이 무감과 무심의 경지는 하라리가 강조한 불교적 명상과도 연관이 있으므로 가급적 제가 하라리를 ‘머리 벗겨진 이슬람 인’으로 놓고, 있는 그대로의 하라리를 여러분께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강단에는 첫 번째로 김민웅(경희대 미래문명원 원장)이라는 분이 나왔습니다. 보이스도 중저음인데다 옷도 어찌나 잘 입으셨던지 왠지 잘 차려입은 연극배우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인사말을 굉장히 짧게 하셔서 일단 합격. 그 다음으로 하라리가 나왔고 둘이서 마주봤는데 ‘당신 사이보그 아니고 진짜 사피엔스 하라리 맞느냐“라고 묻더군요. 꽤 괜찮은 유머감각을 가진 노인이라는 생각이.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교수가 당신은 유발 하라리가 아니라 유발하리라, 라고 말했다‘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별로였다고 여겨집니다. 더구나 ’당신의 이름에는 노아가 들어가는데(유발 하라리의 풀네임은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oah Harari이지요), 정말로 우리가 당신의 노아의 방주를 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싶다, 라고 할 때는 언어유희를 세련되게 쓰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들 새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영어로 이루어지는 강의가 지속되는 동안, 대형 스크린에 올라오는 한글 번역문을 읽기 급급한 저와는 달리, 영어로 원만한 의사소통을 하는 노교수를 보면서 저는 부끄러움도 함께 느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하라리의 농담에 즉각적으로 터지는 몇몇 사람의 웃음소리를, 발화와 번역문의 시차로 인해 터덜터덜 뒤늦게 따라가는 저의 입 꼬리는 노교수의 유머감각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제 기분이야 어쨌든,
하라리의 본 강연이 마침내 시작되었습니다. 힘(Power), 합일(Unity), 행복(Happiness) 총 3가지의 키워드로 인류의 역사를 조망하는 동시에, 1500년 하루 동안 인류가 쓰는 칼로리가 13조 칼로리에 불과했던 것과는 달리 현대의 우리는 1500조 칼로리를 소모한다는 일례로, 사피엔스가 이루어낸 지속적인 힘(Power)의 발전과정을 논증했습니다. 또한 펭귄 1마리당 1000마리에 해당하는 식용 닭의 숫자를 예로 들며, 인간의 ‘개체 수 통제’ 역시 진화론적 자연선택을 지적설계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 키워드인 행복(Happiness)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띱니다. 사피엔스의 힘의 발전과정과는 별개로 사피엔스의 행복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했습니다. ‘갑자기 나에게 500만원이 주어졌다’ 라는 ‘객관적 사실’에 대해 억만장자가 만족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주관적 기대치’가 500만원이라는 액수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이처럼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기대치의 상관관계이므로 아무리 갈망한단들 영원한 행복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역사의 발전단계와는 별개로 인류의 행복의 총량은 늘 동일했습니다.

DNA 역시 이것을 원치 않습니다. 만일 “도토리 하나로 영원한 행복을 느끼는 돌연변이-다람쥐가 있다고 칩시다. 이 다람쥐는 천적이 와도, 배가 고파도 영원히 그 상태에 교착돼서 죽게 됩니다. 즉 다람쥐 자신의 DNA 보존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라고 하라리가 말할 때, 그가 사피엔스를 쳇바퀴를 돌리는 조그마한 동물에 빗대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쳇바퀴는 다름 아닌 현대의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키워드 합일(Unity)과 연결됩니다.

 미시적 관점이 아닌, 거시적 관점으로 역사를 조감할 때 인류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즉 전 세계는 현재 하나의 정치경제적 모델로 통합되었습니다. 이 세계가 자본주의와 과학, 그리고 제국주의가 결합한 케르베로스라는 사실을 우리는 책에서 읽었지요. 여기에서 잠시 파노프스키의 말을 덧대자면, 15세기 원근법(일점투시도법)의 발견은 곧 근대의 발견, 곧 주체의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소실점을 기준으로 차곡차곡 배치된 사물들을 상품에 비유할 때, 나는 그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주체=소비자인 것입니다. 이 소비자는 동시에 무엇입니까? 바로 국가의 주인(주체)인 국민입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상의 주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만, 사실 이 자유민주주의적 주체는 사실 텅 비어있고, 그가 보는 원근법적 풍경 역시 환상에 불과합니다. 원근법의 소실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20세기 세잔과 피카소 등의 입체파 회화의 다중투시도법을 통해 이 일점투시도법의 허상을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美), 즉 아름다움은 정치적입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자꾸 큐비즘적 2차원의 세계를 3차원적 원근법의 세계로 구겨 넣으려고 하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고 선택의 주체일 것이라는 낡은 환상을 주입합니다. 이를 통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가동될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취향과 개성, 다양성이라는 낭만주의적 개념이 소비지상주의와 결합하면서 마침내 21세기적 파노라마(혹은 파놉티콘)가 완성됩니다.


유발 하라리는 이런 속박된 아름다움과 우리의 행복과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합니다. 마을에 살던 개인들은 그 마을 공동체에 속한 (가령 마을에 50명이 있다면) 50명과 나 자신을 비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매스 미디어의 등장으로 (가령 <태양의 후예> 송중기나 송혜교 같은) 그 국가에서 가장 뛰어난 500명과 나 자신을 비교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미에 대한 주관적 기대치를 서로에게 강요하면서 점점 동일해지고 동시에 불행해지는 걸까요. 여기서 성형의 역설이 있습니다. 성형은 이러한 정신적 폭력이 외과용 메스(육체적 폭력)로 전도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도 가능해집니다. 패널로 나온 김윤정 교수의 “글로벌 엠파이어가 더 큰 불평등을 가져다주지 않겠나?”라는 질문에 하라리는 “독립 국가가 제국보다 더 낫다고 볼 수는 없으며 모든 것은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동유럽 유대인 조상들은 합스부르크 제국 휘하에서 가장 행복했다, 제국에서 오히려 폭력은 줄어든다” 라고 답했습니다. 비만이나 자살로 사망하는 사례가 테러나 국가적 폭력으로 사망하는 사례보다 현저히 높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거식증, 자살률의 급증은 급감한 육체적 폭력과는 반대로 과도해진 정신적 폭력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요. 성형과 자살의 예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신적 폭력이 육체적 폭력으로 전도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제국주의에 대한 논의에 관해서는 더 놀랍게도 하라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갑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는 범국가적인 차원이다. 유일한 해답은 전 세계가 경제성장을 멈춰야 한다. 그러나 가령 미국이 중국에게 ‘지구 평화를 위해 경제성장을 멈추세요.’ 라고 말했다고 치자. 당연히 중국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 혼자만? 그러는 너는?’ 따라서 이건 불가능하다.” 결국에는 “글로벌 엠파이어가 등장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국제적 지도가 자연적인 방식으로는 형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재앙이 닥칠 것이고 그로 인해 세계가 재편될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의 첫 번째 사도는 이 대머리 이슬람 인이었던 걸까요. 더군다나 그는 글로벌 엠파이어에서 과도해질 불평등에 대한 김윤정 교수의 첫 번째 질문을 완전히 묵과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적 동일성이 과도한 정신적 폭력을 낳았다는 것은 왜 문제시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이 계속 제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하라리의 본 강연이 끝나고 시작된 대담의 주된 내용은 A.I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이택광 교수는 “당신이 그토록 높이 사는 A.I는 그러나 인류의 도구일 뿐이다. 이번 대한민국 총선에서 빅 데이터는 여당의 압승을 예언했지만 완전히 틀렸다. 얼마 전 토론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여당이 이길 거라고 할 때, 나만 야당이 이길 거라고 했지롱. 의심가면 집에 가서 유튜브 찾아보셈.(정신분석핡핡.)”
이어서 안병진 교수도 “빅 데이터도 12년 미국 대선 때 오바마가 헬스케어를 공약으로 내세울지 몰랐다. 이번 알파고와 이세돌의 4국도 봐라. 이세돌이 알파고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수를 두었잖아? 아무리 많은 알고리즘을 알고 있어도 예측할 수 없는 수가 있다면(그런데 이 양반이 어디서 약을 팔아)?”하며 협공을 펼쳤습니다.

이 이슬람 인의 혀는 위 질문들 앞에서는 창공의 다마스커스처럼 예리하게 빛났습니다. “인간은 신을 만들었지만, 자신의 피조물 때문에 전쟁까지 하면서 죽어간 것은 십자군 전쟁만 보아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을 섬기듯이 인간이 A.I를 섬기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 가령, 신과 마찬가지로 푸조나 삼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의 ‘Corporation’이란 단어에서 빠진 것은 ‘Corpus’, 즉 ‘육체’다. 현대의 법인만 보아도 명백하다. 현재 홍콩의 금융 신탁사의 5명의 이사 중 한 명은 A.I이며, 만일 이러한 A.I를 하나의 법인으로 인정하는 날이 온다면, 여러분이 A.I에게 소송을 당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건 부록인데) 우리가 A.I에게 대체될 날도 멀지 않았고.”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반론은 하나밖에 없겠지요.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김민웅 교수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그럼. 당신은 40년 후에 유용할거라고 믿는가?”
“(웃음)그러기를 바란다. 내가 일약 유명세를 얻으면서 경계하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 이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유연함이 없어질까 하는 두려움이다. 또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져서 점점 명상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진다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매일 2시간, 일 년에 한 달은 모든 연락을 끊고 비파세나(불교의 한 종파인 듯?)의 교리를 따라 명상을 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내가 아는 스토리를 덧붙여서 인위적인 세계를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시간이 없어지고 있다.” (여기서도 유용성을 질문한 김민웅 교수의 질문에 적확한 답변은 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김윤정 교수님이 다시 짠-하고 등장합니다.
“교육을 통해 A.I의 지배를 막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라리 왈, “ 현대 교육 제도는 18-19세기의 산물로 낡은 제도에 불과하다. 정답만 찍는 시험공부가 아닌, 답이 없는 문제를 아이들에게 제시하고 생각하게끔 하자, 이 세계는 카오스처럼 확실성보다는 불확실성에 가깝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답하면서 직접적인 답변을 세 번째로 피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런 말도 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 한쪽으로 편향되지 말자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피한 답변들을 종합해 볼 때 하라리는 아무래도 비관적인 미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쇼스키 남매의 영화 <매트릭스>같은 세계. A.I에게 지배당하는, 결국 A.I의 지능이 사피엔스의 인지능력을 초월하게 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그의 머릿속에는 짙게 깔려있다는 생각이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라리는 차기 글로벌 엠파이어의 주체는 구글, 페이스북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페이스북은 40%의 부동층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원한다면 그들을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페이스북이 이러한 데이터를 미국정부에 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강연 결론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가 자신이 본 그대로는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A.I가 예술가마저 능가할 것이라고 보는지에 대한 일반인의 질문에 하라리는 그렇다, 라고 답했다는 것은, 미가 정치적이며, 따라서 모든 예술은 정치적라는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컨대 <불교 파시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일본의 선불교가 파시즘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내용인 것 같아요. 아쉽게도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입니다. 그러나 어쩐지 읽으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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