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비슷한 사람에게 빠져드는가?
지구 반대편, 서유럽과 동아시아, 인구 150만 명 정도의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소년과 소녀는 비슷한 꿈을 꾸고 있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곳,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삶에 대한 두 사람의 들뜬 열망은 도시의 가장 어둡고 은밀한 공공장소에서 해소되었다. 2시간여 동안 스크린에 투영된 타인의 삶 속에서 희극과 비극을 함께 경험하는 즐거움에 비밀스럽게 몸을 기대고 두 사람은 각각 한 시기를 견뎌냈다. 특이할 것 없는 경험을 아주 남다른 것으로 여기고 있던 두 사람이 같은 기억을 안고 있는 서로를 발견했으니, 그 관계는 자연스럽게 특별한 위치에 올라선다.
나와 닮은 존재에 대한 감동으로 시작했지만, 이 관계가 발전할 수 있었던 핵심은 사실 "다름"이었다. 상대가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내 세계의 "이방인"이라는 점은 서로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강한 매력으로 다가왔고, 그 중심에는 색다른 상대의 "식문화"가 있었다. 먹는 일에 대해서라면 남부럽지 않은 열정과 자긍심을 뽐내는 두 나라에서 온 우리는 더 잘 먹기 위한 노력을 경시하지 않는다는 공통의 기본자세가 있었고, 그에 더해 남들보다 조금 더한 식탐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시아 음식이라고는 일본의 스시와 꼬치구이, 중국의 볶음밥과 탕수육 정도가 다였다는 그에게, 비빔밥, 된장찌개, 닭갈비, 떡볶이와 같은 한식들은 새로운 세계였다. 외국인들은 싫어한다는 발효된 된장, 푹 익은 김치 같이 냄새나는 음식들을 과연 잘 먹을 것인가 하는 나의 걱정은 아주 빨리 기우로 드러났다. 돼지 발, 소의 혀, 거위의 간 심지어 달팽이까지 요리해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민족의 후예는 어떤 냄새에도 선입견이 없었고, 웬만해선 이질감을 표현하지 않았다. 발효음식이라면 이미 치즈와 요구르트 등으로 익숙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심지어 매운 음식조차 (어떤 경우엔 나보다) 잘 먹었다.
신세계를 맛본 것은 물론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우선, 내가 가장 감동하며 취해있었던 그의 세계는 요리에 대한 열정이었다. 아니, "남자 사람의 요리에 대한 자세"라고 해야 맞겠다. 요리와 집안일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것이라는 생각과 "너 그렇게 해서 어떻게 시집 갈래"같은 핀잔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자란 내게, 요리는 아줌마들의 일, 하지만 주부의 야망이 없는 나로서는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니 유학 초기엔 저녁시간 슈퍼에서 아이 데리고 장보고 있는 양복쟁이들을 감동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여러 번 이었고, 그 모습이 참 섹시하다고 까지 여겼었다. 그런 내게 요리 앞에서 더없이 진지한 이 남자의 자세는 신선함을 넘는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다. 남녀를 불문하고 한국과 프랑스를 다 통틀어 "레시피" 수첩을 가지고 있거나 심지어 집에 자비로 산 요리책이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신속함"이 커다란 가치인 사회, 패스트 푸드, 배달 음식, 값싼 외식이 음식문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회에서 온 내게 이런 "슬로우 푸드"들이 늘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식사 한 끼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이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급기야 돼지뼈로 육수를 내어 일본 라면까지 집에서 만들기 시작했을 땐, "그냥 사 먹지"하며 툴툴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주말에는 무엇을 먹어볼까를 함께 정하고, 각자의 용돈을 모아 함께 예산을 짜보고, 장도 보러 가고 여러 가지 레시피를 비교해 이야기하는 그 과정의 즐거움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한 사회에서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던 일이 다른 사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일상적인 것들"을 소중하고 진중하게 대하는 유럽적 가치가 내게도 스며들기 시작한거다.
새로 만난 상대에 대해 느낀 호감이 긴밀한 열정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어떤 인식이 우선적일까. 나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라는 공감대와 친밀감일까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호기심과 동경일까.
아주 오랫동안 나는 우리 두 사람이 기본적인 정서적 베이스가 비슷하고, 같은 방향의 미래를 바라보았던 덕분으로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 돌아보면, 어쩌면 그것은 서로에 대한 호감이 만들어낸 오해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오해들 덕분에 관계의 과정들은 더 화려했고, 뜨거웠고, 덕분에 오래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의 첫 저녁식사에서 공중 부양하고 있던 나를 중력으로 끌어내린 그의 한마디, 서버의 핀잔에 무안해진 나를 보며 괜히 미안해하던 그에게서 나는 공정함과 자상함을 떠올렸으나, 그것은 어쩌면 지금의 관계에서 종종 내가 답답함을 느끼는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온정주의" 였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사춘기 시절을 혼자 영화관에 다니며 위로받았다는 사연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잘 드러내지 않고 혼자서 고집스럽게 안고 있는 서로의 성향을 일찍 눈치챘었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는데 필요했던 몇 가지의 상처들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어쩌면 상대가 보여준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본 것이 아닐까. 내 각도에서 그것을 보고, 원하는 것만을 들으며 감상에 잠겨 실제의 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누군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실은 우리는 모두 다 "다른 세계"의 사람들인지 모른다. "나와 너무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저 욕망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신기루일 뿐.
하지만 그 모든 과정들이 그리도 달콤하고 황홀했다면, 그것이 진실이 아니었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그 어떤 경험도 지나고 나면 각자의 방식으로 요리되어 각자의 맛으로 기억될 텐데.
어차피 모든 연애는 다른 행성을 탐사하는 일 같은게 아닐까.
* 표지 : 영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Une nouvelle amie/ François Ozon/2015
본문 그림: 영화 "사랑은 마법처럼" 중 Main dans la main/ Valérie Donzelli/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