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미성 Jul 12. 2016

투른느도 로시니와 붉은 와인

어떤 사랑의 시작

1947년 뉴욕의 어느 겨울밤. 

전형적인 미국식 다이너 식당에 한 프랑스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창문을 등지고 바 좌석에 앉아있다. 별다른 움직임 없이 본인의 음식만 먹고 있는 우직한 뒷모습에서 무심함이 풍기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장소가 익숙지 않은 듯 좌우로 의자를 돌려가며 사방을 살피고 있다. 그녀의 앞으로 입도 대지 않은 듯 가득 찬 맥주잔이 보인다. 돌아가는 의자를 따라 몸을 반쯤 틀고 있던 여자에게 식당의 젊은 서버가 활짝 웃으며 다가와 정적을 깬다. 

«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  

살짝 토스트 해서 반으로 자른 하얀 식빵 사이로 파스트라미가 겹겹이 10센티는 될만한 높이로 쌓여있고 그 옆으로 오이 반쪽 만한 커다란 피클 한 덩어리가 놓여있다.  

여자는 접시 속 음식을 잠시 바라보다가 남자에게 묻는다. 

« 마르셀, 이게 뭐예요? » 

남자는 고개를 돌려 흘낏 보더니 « 소고기예요. 한번 먹어봐요 » 하고는 다시 본인의 샌드위치에 집중한다. 여자는 탑처럼 쌓아 올린 파스트라미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으며 말한다. 

« 비에 젖은 개 냄새가 나는군요 »

서버가 그런 여자를 지켜보다가 서둘러 나타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 고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 여자는 옆자리의 남자와 서버를 번갈아보며 « 뭐라는 거예요? »묻고, 남자는  «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녀는 그저… 그저… 괜찮아요 » 하며 서툰 영어로 서버를 안심시킨다. 그런 남자를 보며 여자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 당신의 영어는 이 샌드위치만큼이나 훌륭하군요! »

여자의 농담에 분위기가 조금 유쾌해지는가 싶지만, 여전히 여자는 샌드위치에 관심이 없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여자를 보고 남자는 묻는다. 

 « 여기 분위기가 별로인가요? » 

« 조금 놀랐어요. 당신이 전화했을 때, 뉴욕에 홀로 있는 우리 프랑스인 둘이서 같이 식사나 하면 어때요,라고 했을 때 나는 다른걸 기대했거든요 »

 « 나는 항상 여기에서 식사하는걸요 » 하며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여자는 잠시 체념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한다. 

« 어쨌거나 당신은 누구에게 밥을 사는 일로 파산할 일은 없겠네요! » 

남자는 이제 웃지 않고 잠시 여자를 본다. 그리고 돈을 내고 일어선다. 



얼마 후, 두 사람은 한 프랑스 식당의 시끌벅적한 홀에 앉아 메뉴판을 보고 있다. 

이번에는 남자가 메뉴판과 여자를 번갈아 보며 어색한 듯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흰 셔츠에 검은색 조끼를 갖춰 입은 서버가 다가오고 남자를 향해 « 고르셨나요? » 묻는다. 남자는 서둘러 메뉴판을 접으며 힘차게 « 파스트라미 두 개요 » 한다. 여자가 황급히 메뉴판에서 고개를 들며 남자를 향해 말한다. 

« 아니, 아니에요! 내가 주문할게요. 투르느도 로시니 (tournedos rossini)* 두  접시와 샤또 안젤루스 1938년 산으로 주세요! » 

남자는 웃는다.

« 배가 많이 고팠나 봐요 »

« 개 냄새나는 고기 요리보다는 이게 더 좋아요 » 

남자와 은근하게 눈을 맞추고 여자는 말한다. 

« 우리,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요? » 

« 그래요 »

남자는 웃으며 끄덕인다.

서로를 잘 모르는 남녀가 처음 만났을 때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이제야 시작된다. 

«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됐어요? »

« 8주요 »

« 미국이 좋아요? »

« 음… 글쎄요. 나는 그들을 이해 못하고, 그들도 나를 이해 못하죠… » 

« 파리가 그립겠군요 »

« 죽을 만큼 » 

서로의 취미생활에 대한 가벼운 대화와 농담이 이어지고 와인이 서빙된다. 


서버가 다가와 테이스팅을 위해 와인을 조금 따라주자, 남자는 서둘러 한 모금 맛을 본다. 입안에서 몇 초간 와인을 음미하고, 서버에게 좋다고 말하는데, 이어 와인이 쿨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잔에 담길 때까지 여자는 그런 남자를 한참 바라보고 있다. 지금 막, 압도적인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두 사람의 만남 이후 처음으로 여자의 눈빛에 의미가 담긴다. 언젠가 남자와의 만남을 추억하며 여자는 지금을 아주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으로 기억하리라. 매료되어 그윽해진 여자의 시선을 남자는 발견했을까? 대화는 점점 온기를 띄고 내밀해진다. 고향에 두고 온 돼지 농장과 같은 친밀한 대화들이다. 서로에게 호감 가득한 남녀의 테이블에서 붉은 와인이 해 줄 수 있는 역할이라면 이런 것이 아닐까. 그 공간에 단 둘이 남은 듯이 시간을 잊게 하는 마술, 매일매일 같은 식당에서 같은 음식만 먹던 남자로 하여금 이런 말도 던지게 하는 마력. 

« 당신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 알고 있어요? »

여자는 그날 밤 이 순간을 상기하며 같이 사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 그때, 그 남자가 나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왔어. 그러고는 말했지. 보랏빛 파랑이예요. 그 말을 할 때 그 남자의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정말 아기 같았어 » 


누군가의 인생에서 길이 회자될 어떤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일생을 담은 프랑스 영화 « 라비 앙 로즈 »에서 그녀가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부분이다. 영화에서는 그 어찌할 바 모르겠는 설렘의 기운 때문에 키스도 하지 않고 헤어지는 이 남녀의 모습 위로 노래 « 장밋빛 인생 »이 퍼져나갔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복서와 가장 사랑하는 국민 가수의 역사적인 로맨스였다. 

에디트 피아프 + 마르셀 세르당



일단 테이블에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시고 눈을 바라보면, 어떤 관계라 해도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들이 그날 밤 옆으로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파스타라미 샌드위치를 먹었어도 그들의 첫 만남은 사랑으로 시작됐을까. 각자 자기 앞의 세상을 마주하며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과 돼지농장, 이국생활과 커리어에 대한 불안을 떠올리느라 시선을 마주치고 감상에 젖어들 여유는 없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붉은 와인의 매혹적인 관계가 아닌 여름날 청량감 있는 맥주 한잔과 같은 우정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남녀관계의 최선이 사랑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날 마주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온 생애를 가로지를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마르셀 세르당은 그 2년 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더 빨리 와달라고 피아프가 간절히 요청하여 일정을 앞 당겨 타고 간 비행기였다. 그 후 피아프의 건강도 급격히 쇠약해져 무대에서 실신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 사랑의 상실과 죄책감 속에서 그녀는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녀가 그 후 발표한 "사랑의 찬가 ( l'hyme à l'amour) " 와 " 신이시여 (mon dieu)" 는 마르셀 세르당을 위한 곡이었다. 


에디트 피아프, 신이시여

https://www.youtube.com/watch?v=RgvEV9B-IEw





* 투르느도 로시니 (tournedos rossini) : 소고기 안심을 양념해서 앞 뒤로 살짝 익히고 뜨거운 팬에 살짝 구운 생 푸아그라와 트뤼프 조각을 함께 올려 먹는 요리.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가 파리를 방문했을때 그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요리라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토록 색다른 당신의 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