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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미성 Jul 28. 2016

거친 세상, 찰나의 달콤한 위로

 디저트의 시대

바야흐로,  파리엔 명품 디저트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니, 파티스리 (Pâtisserie), 달달한 베이커리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몇 해 전 부터의 돌풍이다. 이전에는 동네 빵집의 진열장 한편 디저트 빵의 대열에서, 그 안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각종 과일 파이들 곁에 숨죽이고 있던 에클레르, 슈, 마카롱 같은 제과류들이 최근 몇 년 사이, 그 위상을 달리하고 있다. 이젠 그 품목 하나하나만을 전문으로 하는 독립적인 상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상점의 위치와 겉모습 또한 « 빵집 » 치고는 너무나 화려해져서, 들어가기 전에 옷 매무새라도 한번 더 확인하게 될 정도다. 에클레르의 경우에도 일반 빵집에만 있던 시절에는 커피와 초콜릿, 두 종류의 맛 밖에 없던 것이 이제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맛들에 화려한 색감과 자태를 뽐내고 있다. 

에클레르 전문점. 스타 파티씨에, 크리스토프 아담의 가게.

에클레르 뿐만이 아니다. 이젠 푸아그라 맛까지 나왔다는 마카롱은 물론이고, 폭신한 작은 빵에 다양한 크림이 담긴 슈들, 천 겹의 페이스트리로 만들었다는 의미인 밀푀이유도 마찬가지다. 각종 컬러와 모양들, 맛들로 새롭게 창조되어 각각 많게는 수 십여 가지의 종류가 생겼고, 그 안에는 « 리미티드 에디션 »이라는 이름까지 붙은 ‘한정 상품’들도 있다. 이들에게는 투명한 종 모양의 뚜껑까지 부여되어 그 안에서도 신분을 달리한다. 

매장에서 직접 만들어주는 프로피테롤 (Profiterol) 가게. 아이스크림을 가운데 넣은 슈 위에 뜨거운 초콜렛을 부어 먹는다.


점원들은 장갑을 끼고 하나하나 조심조심 선택된 상품들을 꺼내 담는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다이아몬드 상이 보석을 다루는 듯한 자세다. 그 포장 상자 또한 내용물의 몇 배는 족히 넘는 부피다. 당연하다, 목적지의 식탁에 올라갈 때까지 작은 흠집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 물론 구매자로서 그 매장을 나설 때의 기분은 괜히 상쾌하다. 종업원들의 친절하고 우아한 감사인사를 뒤로하고 나올 때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쇼핑백이다. 단 돈 8, 9 유로에 마치 엄청난 명품이라도 사고 나온 기분이다.  


마카롱의 잠재력, 소피아 코폴라의 안목  

이 디저트 고급화 열풍의 시초에는 마카롱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신문과 잡지에서 느닷없이 마카롱이 등장하던 그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2006년 여름이었다. 당시 가장  핫한 감독이었던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 « 마리 앙투아네트 »가 깐느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후 혹평과 호평을 동시에 받아 술렁이던 와중이었다. 이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언론은 마카롱과 스니커즈 운동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궁금한 마음을 그대로 안고 바로 상영관에 달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프랑스혁명 전의 마지막 왕조, 사치와 향락을 벌이다가 결국 분노한 민중에 의해 단두대에서 목을 베였다는 마지막 왕비의 이야기를 소피아 코폴라는 과연 소문대로 새롭게 해석해냈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멀리 오스트리아에서 마차를 타고 정략결혼을 위해 프랑스에 온 여자아이, 사랑하는 강아지를 국경에서 빼앗기고 급기야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는 소녀의 이야기, 그 누구나 처럼 즐겁고 유쾌하게, 사랑받으며 살고 싶었을 뿐인 한 소녀의 평범한 성장기로 마리 앙투와네트의 전설은 다시 태어났었다. 마카롱은 그런 소녀의 세계를 상징하는 장치로 등장했다. 그녀의 방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오색빛깔 파스텔톤의 마카롱들은 그 위로 흐르는 모던 록 음악과 함께 제 나름의 상징을 연기하고 있었다. 발랄한 커스틴 던스트가 특유의 도발적인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마카롱을 입에 넣는 장면이 영화를 대표하는 한 컷이 되었을 정도다. 누군가는 질투라고도 했지만, 전작을 넘어서지 못하고 같은 주제를 답습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나는 그 « 파격적인 아이디어»라는 평가도 거품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그깟 마카롱과 운동화가 뭐라고, 현대의 물건 몇 가지가 상징성을 띄고 시대극에 들어갔다고, 그게 뭐라고 그 난리들이란 말인가. 

그 생각은 최근 영화를 다시 보면서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다만 한 가지, 어렸을 때부터 패션 공부를 했고, 유명한 패션학교를 나왔다는 소피아 코폴라의 그 감각만은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녀가 최초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그냥 단순했던 그 디저트 빵의 색감에서 패셔너블한 가능성을 봤다는 것,  그 과자가 "식욕 자극"이라는 태생적 목표를 훨씬 넘어서서, 패션 아이템으로서도 « 갖고 싶은 아름다움 » 의 욕망을 창조할 수 있음을 본 그 감각은 비범하다. 실제로 이 영화의 마카롱을 제작, 협찬했다는 라 뒤레의 홍보담당자는 이 영화 이후로 마카롱과 패션을 접목시키는 시도들이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결국엔 극적인 성공의 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마카롱으로 시작된 파티스리, 디저트 빵의 열풍은 그 후 영미권의 컵케이크, 프랑스의 에클레르, 슈, 밀포이유,최근에는 전통 디저트인 프로피트롤까지로 이어졌고, 패션과의 접목도 활발해졌다. 프랑스의 칼 라커펠드와 크리스티앙 라크루아 같은 디자이너들이 프랑스 유명 제과업체와 협업을 하기도 하고, 루이뷔통, 디올의 그룹으로 유명한 LVMH도 이 열풍에 동참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에 더해 명품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도 프라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의 대기업들이 속속들이 파티스리, 초콜릿 명장들과 함께 이 새로운 산업에 투자하고 있다고도 한다.    

 

거친 세상, 아찔한 위로와 전파되는 욕망 

난데없는 디저트 열풍의 시초를 영화 한 편으로만 보는 것은 물론 아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미권, 아시아 할 것 없이 최근 몇 해동안 전 세계에 불어닥친 이 달달한 먹거리의 열풍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의 중심에는 « 경제위기 » 가 있다. 불경기로 살기 팍팍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달콤한 위로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식사 문화에 디저트가 포함되어 있어 일상적으로 이런 음식들을 먹어오던  서양 사람들에게 더욱 와 닿는 논리일 수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초콜릿, 사탕, 달콤한 오후의 간식은 착한 일을 했을 때 받는 포상처럼, 엄마의 선물처럼 여겼던 기억을 이들은 가지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반대로 나쁜 행동을 했을 때는 그날의 디저트에서 배재되거나 간식을 못 먹게 되는 채벌이 많았다고도 한다. 기본적으로 단 음식에는 « 마음을 위로하는 효과 »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어릴 적 집에서 부모님이, 혹은 할머니가 구워주시던 달달한 파이처럼 마음 따뜻해지는 기억까지 스며들어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힐링 푸드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10유로 정도의 돈으로는 크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요즘 물가 속에서 그만한 위로와 푸근함, 게다가 보기만 해도 탐이 나는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으니 그야말로 불경기 속에서도 엄두 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사치가 아닌가. 


또 한 가지 인기의 요인은 소피아 코폴라가 애초에 주목한 것처럼 그 비주얼적 가능성에 있다. 인스타 그램과 같은 sns의 일상화로 소통의 방식이 말과 문자보다 사진과 동영상 등으로 시각화된 상황에서 예쁘고 화려한 상품은 기본적으로 경쟁력이 강하다. 그에 더해 이 디저트 빵들은 가격의 면에서 접근 가능성이 높으며, 무엇보다 식욕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욕망을 자극할 수 있다. 내가 욕망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보는 모두로 하여금 나를 욕망하게 만드는데 이만큼 즉각적이고 보편적인 피사체가 또 있을까. 가장 파급력 있는 광고매체가 더 이상 TV와 같은 매스미디어가 아닌 시대에, 전 지구 상에 순식간에 퍼져나갈 수 있는 새로운 미디어 sns가 존재하는 시대에 패션과 요식업의 거대한 손들이 손을 잡고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눈으로 먹는 시대가 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짜릿한 순간 

 

« 패션계 » 가 요식업에 들어섰다는 생각을 하면 한편 의아한 지점이 있다. 그곳은 거식증이 만연하고, 또 그 병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건강한 식생활에 있어서는 가장 문제적인 직종이 아니던가?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게 보이는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살아내는 일이 가장 뜨거운 화제인 사람들에게 이 버터와 설탕의 집합체,  설탕 덩어리 음식이 매력적일 수 있을까? 물론 패션계 종사자들, 특히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모델들은 이런 음식을 먹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이들과 비슷한 옷발을 내고 싶어 한 끼 한 끼 메뉴를 고민하고 « 내일부터 다이어트 »를 일상적인 해쉬태그로 끼워 넣는 일반인들에게 이 칼로리 덩어리는 어떻게 이런 인기를 끌고 있는 걸까? 게다가 « 설탕 과잉 시대 », « ㅇㅇ 보다 위험한 설탕 중독 »과 같은 기사가 매일 같이 쏟아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게 아닐까. 위험한 일은 더욱 욕망을 자극하는 이치, 금지된 관계일수록 마음은 더더욱 뜨거워지는 심리. 건강식이라고 소문나 보양식을 찾는 중장년층이 발 벗고 나서는 요리가 됐어도 이 파티스리들은 그토록 욕망을 자극했을까? 많이 먹으면 안 되니까 조금만, 너무 예뻐서 지나치기 힘드니까 일주일에 한 번만, 이렇게라도 달콤함을 맛보지 않으면 세상은 너무 암흑 같으니까 오늘만, 하면서 먹는 그 짜릿한 기분이 아닐까. 


이 글을 쓰면서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즐기지도 않았을뿐더러 심지어 코스요리를 먹으면서도 치즈는 먹을 망정 디저트는 자주 생략했던 나는, 혹시 너무 인생을 재미없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디저트를 먹는 다고 해서, 단 것을 먹는 다고 해서 인생을 더 즐겁게 산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일부러 먹지 않으며 피해 가는 선택 속에는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일종의 절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디저트는 « 요리 »가 아니라고, 화학적으로 만들어진 재료들이라고 치부하며 나름의 논리를 앞세웠지만, 그 안에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어떤 것, 어차피 그냥 스쳐가는 인공적인 달콤함에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는 일이란 다 그렇지 않은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생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일들이 있는 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래서 누군가는 하면서 살고 누군가는 하지 않고도 잘 사는 일들이 있다. 브람스를 듣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고, 사랑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살 수 있다. 다만, 지나고 보면 음악을 듣고 사랑을 했던 순간들만이 강렬한 시간으로, 고된 인생이 그래도 선사해주었던 달콤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방금 지나간 쾌락, 인생은 결국 그런 것 일 지도 모르는데. 라 돌체 비타, 인생의 어떤 순간은 눈이 감길 만큼 아찔하게 달달한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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