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식사
30대 중반의 리비아 남자와 20대 후반의 일본 여자. 큰 키, 건장한 체격에 과묵한 성격의 남자와 아담하고 흰 피부의 상냥한 여자는 그러고 보니 꽤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지만, 사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이 두 사람이 실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반해 있었고, 오랫동안 주변의 눈을 피해 만나왔다는 소식에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는 왜 그렇게 놀랐을까? 일본과 리비아의 문화적, 지리적 거리를 두 사람 사이의 당연한 거리로 치환해버렸기 때문일까. 국적을 떼어놓고 보니, 그들은 그저 평범한 한 남자와 한 여자였다.
프랑스에서도 유난히 무덥다는 도시 리옹에서 초급 불어를 배우던 어느 여름의 일이다. 일본 여성 둘, 한국, 일본, 인도, 리비아 남성 한 명씩, 2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까지 나이도 가지각색으로 다 다르던 그 여섯 명의 친구들과 매일매일 온종일을 함께 보냈었다. 아침 8시에 모여 12시까지 수업을 듣고, 함께 학생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 두 시간을 더 듣고 헤어지는 일상이었다. 프랑스인들은 모두 바캉스를 떠나고 없는 텅 빈 도시에 덩그러니 남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던 우리 모두는, 그렇게 온종일을 함께 보내고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저녁에 파티를 열며 몰려다녔다. 이 리비아 남자를 사랑하게 된 마도까는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온 얼핏 보기에도 현실적이고 똑 부러진 커리어 우먼이었는데, 제2의 인생을 꿈꾸며 와인과 요리 공부를 하러 보르도에 가려던 참이었다. 그렇게 바쁘게 자기 길 만을 갈 것 같던 그녀가 그 와중에 연애까지 하고 있었다니 놀라웠고, 더듬더듬한 불어로 중간중간 영어를 섞어야 가능해지는 그 무디고 투박한 대화 속에서도 어떤 사이에서는 감정이 피어올라 더욱 뜨거운 온기를 내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와 같은 학생 기숙사에 살던 마도까는 얼마 되지 않아 알리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러고는 가끔씩 그 관계가 삐걱거릴 때마다 나를 찾아왔었다. « 국경도 없다 »는 말이 무색하도록 그저 "남과 여"였을 뿐이었던 이들의 관계에도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균열이 찾아왔다. 특이하게도 이들에게는 그것이 « 입맛 »의 문제로 시작되었는데, 일본과 리비아의 지리적, 문화적 거리가 가장 일상적인 일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마도까는 일본 음식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요리를 즐기는 그녀로서는 무엇보다 일본 요리를 할 수 없다는 게 불만 이었는데, 매 끼니마다 알리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랍 음식들에는 향신료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며, 무엇보다 매운맛을 즐기는 알리 때문에 그녀는 위에 병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매번 우리의 대화는 그녀의 « 두고 온 » 모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졌다. 나도 그동안 먹어봤던 일본 음식들을 이야기하며 맛있는 기억 소환하기에 신나게 동참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음식을 공유할 수 없다니,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정말 힘들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본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없는 나로서는 그것 말고는 달리 위로의 방법이 없었다.
무덥고 고독했던, 이방인들의 여름이 그렇게 지나갔다.
서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고, 필름 카메라로 단체 사진을 찍으며 우리는 떠들썩하게 이별을 했다. 마도까는 결국 알리를 두고 예정대로 보르도로 떠나기로 했고, 나는 더 남아서 어학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다시는 못 보게 되나 보다 하는 자각도 못하고, 새 학기 준비로 내 일에만 몰두하던 그 여름의 끝이었다. 도서관에서의 하루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문고리에 종이봉투 하나가 걸려있었다. 서둘러 들여다본 봉투 안에는, 도시락 두 개와 편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 네가 좋아한다던 장어 덮밥을 꼭 한번 요리해서 대접하고 싶었는데 너무 늦었나 보다.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는데 네가 없어서 그냥 두고 간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언젠가 꼭 다시 만나길… »
봉투 안에는 두 개의 도시락이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같은 기숙사에 살고 있던 다른 일본 친구 마꼬또를 찾아갔다. 지금, 이 일본식 장어덮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맛있게 먹어줄 또 다른 한 사람일 것 같아서. 그 밤, 오랫동안 모국의 요리에 굶주렸던 아시아인 두 명은 나란히 앉아 감탄하고 또 감탄하며 장어 덮밥을 먹었다. 이렇게 요리를 잘하는데 이걸 다 마음껏 해먹을 수 없었다니, 마도까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진작에 더 친하게 지낼걸, 농담하면서. 보르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 그녀가 일본에 열 식당은 정말 훌륭할 거야, 꼭 가봐야 할 텐데 우리끼리 기대하면서.
그녀는 다 잊었겠지만, 나는 지금도 장어 덮밥을 보면 그 날이 생각난다. 허름한 기숙사 책상 위에서 온기를 내던 흰쌀밥과 그 위로 단정하게 나란히 놓여있던 갈색 양념의 장어 조각들과 밥을 하고 장어를 구우며 나와의 작별을 생각했을 친구의 마음에 목이 메던 순간이 다 생각난다. 어떤 요리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나중에 생각하면 그 음식의 맛이 아닌 마음의 모양으로 떠오른다.
그런데 밥 한 그릇 안에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가 전달되었던 것은, 우리가 같은 음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비슷한 문화권에 살았던 덕분일까? 리비아 남자 알리는 마도까를 그토록 사랑했어도, 그녀의 요리까지는 사랑하지 못했던 걸까? 과연 입맛의 국경은 사랑으로도 넘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같은 국적의 사람들과 살면서도 라면에 계란을 넣는 방식 하나로, 신김치에 대한 호불호 하나로, 육식에 대한 취향 하나로 얼마나 티격태격하며 살고 있는가. 그들도 실은 어느 연인이나 다름없이 '사랑한다면...'의 가정으로 상대가 나에게 맞춰주길 바라고 서운해하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도까가 눈물을 글썽이며 못살겠다 한 것은 일본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 정도도 양보해주지 않는 남자 친구에 대한 서운함이었음을 나는 나중에야, 몇 번의 연애를 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다만, 어떤 관계에서는 입맛의 문제가 너무나 미미한 것일 테지만, 그것이 잃어버린 어떤 것, 절절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방인들에게는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절실함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이 커플은 잊고 지내던 외로움을 매 끼 식탁 위에서 마주하며 관계의 현실을 자각했을 것이다. 그때 그걸 알았다면 더 적합한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뒤늦게 스쳐갔다.
또한, 알리도 마도까가 마지막 인사로 남기고 간 장어덮밥 앞에 덩그러니 남겨졌다면, 나처럼 마음의 눈물을 흘리며 맛있게 먹었을 것 같다. 아니, 나보다 더 큰 고마움과 미안함과 슬픔을 느끼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식사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도 그 후로 오랫동안 장어덮밥을 수소문하며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어쩌면 실제로 일본 요릿집을 찾아다니며 추억에 젖는 리비아인으로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가 그 후로 리비아에 돌아갔다면, 이 모든 이야기는 공허하고 사치스러운 백일몽처럼 여겨지겠지만...
사족이지만, 몇 해 전 출장차 방문했던 리비아에는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꿈꾸며 총을 들고 거리에 나온 대학생들이 있었다. 그 길에서 마주친 한 의대생은, 청년들이 국경 밖으로 나가 다양한 삶을 꿈꿀 수 있도록 교육하고 기회를 주는 나라를 꿈꾼다고, 이에 필요하다면 본인의 인생은 희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들으며 언젠가 다시 와야지, 이들의 소망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 다시 와서 봐야지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혁명에 성공하면 어떻게든 정리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길고 난폭한 소용돌이의 서막이었을 줄은...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