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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미성 Mar 20. 2016

적과의 식사

프랑스 요리와 외교

1814 년 9월의 일이다.  200여 명에 달하는 유럽 각국의 공주, 왕자들과 216명의 외교대사들은 모래바람을 가르며 털털거리는 마차를 타고 모두 한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행기도 없었고 국경도 높았던, 유럽 열강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회의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유럽사에서 거의 최초로 꼽히는 이 국제회의의 단초는 프랑스가 제공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혁명으로 일으킨 프랑스의 공화국 체계에 심기 불편해하며 간섭을 늘어놓던 주변 국가들을 프랑스가 전쟁으로 제압하고 나선 지 약 17년 만의 일이었다. 유럽의 크고 작은 90개의 왕국들과 53개 공국의 대표들은 그 후속 조치와 함께 새로운 외교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유럽의 심장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오스트리아 빈으로 먼 길을 떠났다. 지금으로 치면 유럽정상회의 정도에 비교될 수 있을까 싶은데 의미는 비슷해도 그 모습은 많이 달랐나 보다. 멀고 먼 자국 에서 두눈 부릎뜨고 지켜보고있는 유권자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번 모이는 데에도 수 일이 걸리는 당시로서는 시간개념도 달랐을거다. 유럽지도를 어떻게 개편 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를 두고 유럽의 주요 열강들은 긴장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기타 왕족들은 이 회의를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최대의 사교의 장으로 여겨 밤이면 밤마다, 날이면 날마다 크고 작은 파티로 흥청거렸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함께 축배를 들며 사교댄스를 출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프랑스 대표 였을것이다. 패전국으로서 프랑스는 어쩌면 이 회의에 참석조차 불가능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간 자존심에 상처를 준 열강 4국인 영국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 모이는 곳에는 더더욱. 

하지만 19세기 초반의 프랑스에는 정치의 천재, 타고난 외교관이 살고 있었다. 혁명의 피바람 속에서도 권력의 핵심부에서 건재했던,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 (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탈레랑 재상이다. 혁명의 칼바람으로 잠시 미국에 망명했었지만 다시 돌아와 나폴레옹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고,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쫓겨났어도 루이 18세를 중심으로 다시 왕정을 세우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이다. 루이 18세는 이 절름발이 천재, 탈레랑을 오스트리아 빈에 보내기로 했고, 그 결정은 프랑스 역사 속 가장 인상적인 « 한 수 » 중의 하나가 된다.  그 이듬해 11월 프랑스도 당당히 빈회의의 최종 승인권자 5개국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열강들의 횡포를 두려워하는 약소국들의 의견을 모아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유럽 확장권을 두고 으르렁거리는 영국과 러시아의 사이에서 급기야는 « 조정자 » 역할을 하며 존재감을 확장시켰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프랑스는 비극의 원흉인 패전국이 아니었던가. 탈레랑의 « 외교술 »이 또 한번 그 힘을 발휘한 것인데, 이 마법에 가까운 협상을 이루어낸 그의 전술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 얼마만큼의 화술과 외교감각이면 위험에 처한 자국의 영토를 지켜낼 수 있단 말인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비결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빈으로 떠나기 전, 탈레랑은 루이 18세에게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와 최고의 식재료들을 요구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요리의역사에 있어 최고의 셰프로 여겨지는 앙토낭 카렘(Antonin Carême)은 그렇게 탈레랑과 함께 마차에올랐다. 이미 만남과 사교의 장이 되어 흥겨운 파티가 아침 저녁으로 펼쳐지고 있었던 비엔나에서 프랑스 요리의거장은 할 수 있는 일도 많았고, 순식간에 환영받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탈레랑은 매일 아침 그 날의 메뉴를 고심하면서 앙토낭 카렘과 함께 주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마법이, 그 전술의 핵심이 실은 최고 요리사의 프랑스 요리였다고 한다면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에 대한 모욕일까 ? 

하지만 « 대포 보다 냄비로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 » 거나 « 내게 훌륭한 셰프를 주면 흡족한 협정을 주겠다 »고 했다는 탈레랑의 어록이 ‘외교의 신’ 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에게 훌륭한 요리는 협상의 강력한 필살기였던 것 같다. 안되는 일을 되게 할 수는 없겠지만, 외교도 결국 사람이 하는일. 샴페인을 터뜨려 마음을 들뜨게 하고 푸아그라와 트뤼프와같은 진귀한 재료로 호기심을 자극하며 달콤하고 화려한 디저트로 마음을 녹여주는 일의 위력, 당시 최고의 전성기였던프랑스 요리가 해낼 수 있는 그 엄청난 일들을 탈레랑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해 회의의 마지막 성찬은 프랑스의 브리 치즈로 끝을 맺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브리 치즈는 « 치즈의 왕 » 이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이는 다시 유럽의 심장으로 복귀한 프랑스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미식외교"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회자 되고 있다. 


프랑스 요리의 외교력은 그 후로 오랫동안 지속되어약 150년 후엔 급기야 신대륙의 외교에까지 팔을 걷어붙이게 되었다. 1961 년,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백악관의 요리사로 프랑스인 셰프 르네 베르동을 임명한다. 그때까지 요리에는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손님들이 올 때 마다 전형적인 출장요리를 내놓던 백악관이 미식가 영부인, 재키 케네디를 맞이하며 생긴 변화였다. 프랑스 셰프의 첫 공식 요리는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해럴드 맥밀런을초대한 점심 만찬이었고, 그날 뉴욕타임즈는이날의 식사메뉴를 자세히 소개하며 이렇게 정리했다고 한다. 

"영미관계를 발전시키는데 프랑스 요리만한 것이 없다". 


한 없이 정치적인 식사 


열정적인 식탐이 프랑스적 이미지를 생산해 대중의 공감까지 얻었던 정치인으로 치자면 단연 자크 쉬락 대통령(1995-2007) 이다. 쉬락은 미테랑과 같은 까다로운 미식가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젊은 시절부터 워낙 요리에 관심이 많아 요리학교 « 르 꼬르동 블루 »를 다니기도했고, 잠시 미국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식당에서 햄버거를 만들기도 했다는 유명 식도락가이자 요리인인 그는, 농업국가 프랑스에서 대중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무엇에 즐거워하는지 잘 알았다. 그는 다른 정치인들처럼 일반인들이 잘 섞이지 않는 고급 미슐랭 레스토랑을 찾기 보다는, 체크무늬 식탁보가 깔린 동네의 작은 식당들과 허름한 선술집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시간을 보냈고, 파리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 지방에 내려가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시다가 돌아오기를 즐겼다. 또한 매 해 파리에서 열리는 농업박람회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물며  (고급 와인이 아닌) 생맥주를 마셨고, 특산품 소세지를 먹었으며, 지방에서 올라온 소들을 쓰다듬으며 « 이것은 소가 아니라 예술품이다 »라고 말했다. 농업인들의 지지가 중요한 농업국가 프랑스에서 그가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 가장 국민 친화적인 대통령 »이라고 불리우게 된 이유다. 그의 보좌관이었던 장 프랑수아 프로스트는 이에 대해 « 그는 공화국의 가르강튀아다. 그는 대식가이고, 술꾼이며, 호색가다. 프랑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췄다. 그게 바로 골루아 족의 성격이니까 » 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크 시락 Jacques chirac 전 대통령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이런 « 전형적인 프랑스인 »에 대한 이미지에도 변화가 생겼다. 여유롭게 찐 두툼한 뱃살에 붉어진 얼굴로 와인잔을들고 있던 정치인들은 더 이상 현대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주지 못했다. 쉬락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사르코지(2007-2012)는 공공연히 식탁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짧을수록, 식사는 간단할수록 좋다고 말하며 역대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식탐가 이미지와 단절했다. 사르코지보다는 쉬락과 비슷하다는, 미식가에 대식가인 올랑드 대통령도 변화한 대중들의 기호에 몸을 맞추어야 했다. D자형의 몸매에 두루뭉실한 턱선으로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애정을 온몸으로 증명했던 그가 대선을 앞두고서는 혹독한 다이어트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계의 흐름에 보다 빠르게 대처하는 프랑스를 원했고, 정치인들도 식탁에서 머무르며 보낸 시간의 흔적을 감춰야 했다. 다만 이 다이어트 하는 « 모던 타임즈 »의  두 대통령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자발성이겠다. 대통령에 당선된 몇 년 후, 올랑드의 몸매는 재빠르게 이전의 실루엣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요요현상이라거나, 식탁 앞에 그 개인의 의지력이 한없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인지상정 여길 수 있지만, 어쩌면 엘리제 궁의 « 미식외교 » 전통을 철저히 수행하느라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다. 지난 10여년 간 이 상반된 두 명의 대통령 사르코지와 올랑드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교류하고 있는 독일의 수상 메르켈과의 일화를 보면 더욱 그렇다. 

유럽연합이라는 공동체를 꿈꾸던 70년대 미테랑 대통령과 독일의헬무트 콜 총리 시절부터 이 두 나라의 정상들은 미식이라는 공통의 취미 덕분으로 다양한 긴장의 순간들을 모면했다고 전해진다. 쾌락주의자 쉬락과 헬무트 콜 총리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도시 스트라스부르그의 유명 식당에서 달팽이 요리와 독일식 샐러드, 독일의 맥주와 프랑스식 송아지 고기를 먹으며 중요한 회담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프랑스와 독일 정상의 이런 미식외교의 전통은 독일 쪽에서는 식탐가인 메르켈 총리를 맞아 계승이 가능했으나, 프랑스 쪽에서 식사를 그리 즐기지 않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등장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나 보다. 해외의 정상들이 오면 늘상 준비하는, 샴페인과 아페리티프부터 전식과 본식, 치즈와 후식으로 이어지는 만찬이 너무 길다고 판단한 사르코지가 그 코스에서 치즈를 빼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치즈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이 특별히 사랑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유럽연합 내의 권력구조로보나 현재 프랑스와 독일의 세계적 영향력으로 보나 약자는 프랑스 대통령이었다. 사르코지는 메르켈의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 다른 정상들에게는 내놓지도 않은 프랑스의 치즈들을 평소보다 두 배 넘게 준비하라고 했다고 한다.그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을 엘리제 궁에 초대했을 때는 식사를 45분 만에끝내며 « 이렇게 짧은 식사가 좋지 않아요 ? 앙겔라는 먹는걸 너무 좋아해서… » 라고 투덜거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013 년,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를 풍자하기 위해 르몽드가 제작한 표지사진  

풀어야 할 숙제 더미를 어깨에 짊어지고 각자의 이해관계를 등 뒤로 숨긴채 함께하는 식사에서 과연 얼마만큼

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게 과연 진정한 식사이긴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한때 프랑스의 총리였고, 현재 프랑스의 외교관인 미셸 호카르는 « 음식으로 누그러지지 않는 사람은 외교적으로도 힘든상대 »라고 말했다. 잠시 무기를 내려놓고 인간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여유를 즐기는 자세도 어쩌면 외교의 중요한 순간일 수 있겠다. 아마도 메르켈은 사르코지의 뒤를 이어 당선된 식탐 많은 올랑드와의 대화를 더욱 즐겼을 것 같다. 메르켈 총리도 올랑드 대통령도 그들의 몸매가 슬림해질 수 없는 데엔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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