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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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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Sep 24. 2020

poco a poco

시나브로




우리 집엔 큰 화분이 하나 있다.

처음 이 집에 살게 되었을 때 양재 꽃 시장에서 데려온 잎이 큰 뱅갈 고무나무다. 뭐든 혼자는 외로울 것 같아 두 그루를 샀었는데 후추(둘째 고양이)가 물어뜯는 바람에 키가 좀 더 크던 아이는 시들시들 마르더니 말라버렸다. 남은 화분도 후추는 사냥하듯 몸을 둠칫 거리며 때때로 노렸지만 나무의 생명력이 더 강인한 이유인지 다행히도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물론 나의 으르렁도 한몫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만해! 말 못 하는 식물 괴롭히는 거 아니야.

너도 야옹 못하는데 누가 너 괴롭히면 좋겠어?!"



물론 씨알도 안 먹히는 협박이었지만 따라다니며 신문지를 팡팡대는 내가 귀찮았는지 화분을 괴롭히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홀로 남은 뱅갈 고무나무는 잘 지낸다.

그의 외로움에 대해 들은 바가 없어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햇빛이 드는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건강히 푸른 잎을 뻗는다.

조용히 호흡하며 오후의 빛을 만끽한다.



화분은 무신경한 나의 물 주기에도 불평불만한 적이 없다. 근 한 달을 물 주는 것을 깜박할 때도 재촉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공기 중 수분을 한껏 끌어안으며 오지 않는 비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후추의 괴롭힘을 견딜 때처럼 그는 알고 있다.

'절대'라는 게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하나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라는 것을.

3년이 될 동안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없지만 그는 조금씩 성장한다. 늦은 기지개를 켜다 문득 바라본 나무엔 짙은 케일 색의 잎이 한 장씩 늘어났고 아기 손바닥 같은 연한 연두의 잎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자라나고 있었다.

시나브로, 하지만 꾸준히 확실하게 화분은 자란다.



아가는 태어난 지 143일을 지나고 있다.

어느덧 태어났을 때보다 15센티가 훌쩍 넘게 자랐고 몸무게는 두 배를 넘었다.

20일 전만 해도 쥐는 게 서툴러 좋아하지 않던 장난감에 손을 뻗어 잡으려 하는 아가를 보고 새삼 성장에 대해 생각한다. 찰떡이는 태어나 2주 넘도록 눈을 잘 뜨지 않았고 당연한 얘기지만 목도 제힘으로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새벽에도 또랑한 눈으로 말갛게 날 바라보다 휘릭, 몸을 뒤집기도 하고 제 몸으로 서겠다고 발끝에 꼬옥 힘을 주기까지 한다.

오늘은 아윤이 아빠와 함께 외출하려 분홍색 털옷을 입히다 잔뜩 빵빵한 배를 보며 '이 옷을 입는 건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하며 아쉬워했다.

꾸준한 조금씩의 성장이 경이롭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내일과 내일의 내일,

그 내일의 내일의 내일엔 아가는 오늘보다 성큼, 커다란 한 걸음을 걸을 것이다.

한 손엔 아빠의, 다른 손엔 엄마의 손을 잡고 말이다.


그리고 분명 언젠가는 아가의 손이 엄마의 것보다 훨씬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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