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다오

나의 집을 줄게

by 윤신

난 서른 즈음에서야 놓는-비우는 법을 배웠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서른을 훌쩍 넘어서야 겨우 마음을 '조금' 비우고 움켜쥔 것을 슬쩍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뭔가를 이루고 말겠다는 다짐과 욕심, 어떤 심오하고 깊은 철학이 내겐 있소 하는 눈빛, 불완전한 신념의 조각들, 무조건 해내야만 하는 일정량의 목표와 스스로에 대한 기대, 타인의 시선, 11자 복근, 뭐 그런 거 말이다. 물론 해보고 싶은 일들, 가고 싶은 장소도 그 사이 어딘가에 꼭 끼여 있다. 조건이나 상황은 따질 게 아니었다. 뜻이 있으면 행해야지 않는가. 턱없는 허들을 넘기 위해 공중에 몸을 띄우다 넘어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난 가끔, 자주 숨이 턱턱 막히곤 했다.



그러니 이제 8개월을 산 아윤이에게 꼭 쥔 그것을 놓으라고 하는 데는 어폐가 있다. 서른 살의 나조차 못했던 '비움'을 일 년도 살지 않은 딸에게 요구하는 건 무리라는 뜻이다.



요즘 들어 아윤이에게 뚜렷한 의지와 목표가 생겼다.

이걸 만지겠다, 만지고야 말겠다. 입에 넣겠다, 먹어보고야 말겠다.

제 뜻대로 안 될 땐 예의 그 몸을 활처럼 뒤집기 기술이 들어간다.


싫어! 난 내 뜻대로 할 거야!


가까운 얼마 전 처음 통통히 물오른 활을 봤을 땐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당혹감도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옆으로 뉘인 U형의 아윤이에게 말을 걸며 관심을 돌리던가 어느 적정 선에서의 행동을 허락한다.

그래, 케잌 장식끈을 빨아먹는다고 뭐 그리 해가 되겠니.

그래, 지금은 밥 먹고 싶지 않은 기분일 수도 있지.

탐정처럼 추측하고 현자처럼 이해한다. 탐정도 현자도 아닌 탓에 능숙하진 않지만.



제가 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손에 꼭 쥔 아가의 자두알만 한 손을 보며 생각한다. 나도 저렇게 꼭 쥐곤 했지. 거대하진 않아도 뭔가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손바닥에 피가 날 때까지 손을 꼭 쥐곤 했어.

물론 지금도 언제 이루어질지 모를 이상(혹은 몽상)을 품고 있긴 하다. 이전과 살며시 다른 점이라면 휑뎅그렁하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매일 한 걸음씩 실천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막연하던 '작가 되기'를 '올해 독립 출판하기'로 바꾸고 자주 글을 쓰려 노력하며 이렇다 할 기준이 없던 '수영 잘하기'는 '한강 횡단하기'같은 하나의 미션으로 바꾼 식이다.



물론 목표의 범위를 좁혔으나 언제 구상화될지 미지수이긴 매한가지다. 언제 풀릴지 모를 방정식의 해답, 알 수 없는 그 X의 값. 아아, 그 값을 풀려면 얼른 내공이 쌓여야 하는데.

그럴 때면 또다시 조급함을 쌍둥이로 둔 재촉이 내게 와서 인사한다.

'안녕- 잘 지냈지? 근데 뭘 한다고? 그럼 언제 할 거야?'



며칠 전 밤 아홉 시, 듣고 싶던 인터넷 방송 수업이 있었다. 팔로우하던 그림작가의 한 시간짜리 수업이었다. 그 수업을 듣기 위해 이뤄져야 할 일은 오직 아윤이가 곤히 잠에 드는 것이었다. 아가와 따듯한 물로 함께 목욕하고 밥을 먹인 뒤 찹쌀떡 군에게 부탁했다.


"나 듣고 싶은 인터넷 수업이 있는데 아기 좀 재워 줄 수 있어?"


그는 그러마고 아기를 데리고 방으로 갔고 난 아이패드를 켜고 열심히 파란 선, 노란 동그라미를 그으며 꽃을 그렸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하고 10분 정도 지났을까, 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난다. 지익 직- 올리브색으로 줄기를 그리며 들리지 않는 척한다. 하지만 아기는 여전히 운다. 어쩌면 눈물도 뚝뚝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왼손에 쥐고 있던 펜슬을 내려놓는다. 놓아야 할 때다. 기다리던 수업이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다. 점점 꽃밭으로 물드는 화면을 그대로 켜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아윤이가 진정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과 함께 아기를 받아 안는다.

그래, 고깟 그림 한 장이 아가의 잠보다 중요할까.

아기를 꼭 안고 요즘 자장가로 자주 부르는 두꺼비 노래를 개사해서 부른다. 첫 소절은 원래 가사 그대로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다오

아윤아 아윤아 헌 집 줄게 새집다오

아윤아 아윤아 사랑하는 아윤아

아윤아 아윤아 코코자자 아윤아


아윤이 엉덩이가 모래집이라도 되는 양 톡톡 두드리는 사이 아가는 스르르 잠에 빠져든다. 곤한 숨소리를 확인하고 화면 앞으로 돌아가니 이미 수업은 끝나고 작가는 과제를 두 개 내는 중이다.

잠시 아득한 기분이 든다. 수업 한 시간 듣기도 빠듯한 내가 이걸 과연 할 수 있을까. 또 욕심을 부린 건 아닐까. 아윤이를 돌보며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들 다 할 수 있다고 다시 오만을 부린 건가.



물론 찹쌀떡 군은 그 누구보다 자상하고 아가의 곁을 지키는 아빠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역할이 줄어들진 않는다. 개인적 시간은 다소 늘어날지 모르나 '엄마'라는 역할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아기가 원할 때, 언제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

아기의 안정, 안심, 안도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나를 위한 시간보다 아기를 위한 시간을 가진 사람.



두 손을 펼치고 있다 생각했으나 여전히 무언가를 쥐는 나였다.

아기를 기르면 자연스레 '놓는 법'을 배운다더니 어쩌면 내가 놓은 것들은 서막의 소품에 불과했구나 싶다.

하지만 놓는 게 잡는 것보다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꽃 중의 꽃, 합리화 일지 모르나 어떠랴. 이편이 맘 놓고 살기에 더 편하다). 어제를 놓아야 오늘을 잡을 수 있다. 무엇을 택하고 할 것인가. 다른 말로 무엇을 택하지 않고 버릴 것인가. 어차피 인생은 기회비용의 축제이니 뭘 하나를 하려면 다른 하나는 놓칠 수밖에 없다 - 그러나 모든 것을 하지 못하는 데 있어서 아기 핑계를 댈 순 없다. 자연 언니의 말대로 아윤이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늘 시간은 모자랐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게 무엇이 제일 중요한 것인가- 무엇을 선택하고 집중할 것인가 -



육아는 비우는 것이라 했다.

마음을 비우고 시간을 비우는 과정.

놓고 놓아 정돈된 내 속에서 아가가 기고 걷고 성장하는 과정.

첫 문장을 수정해야겠다.

난 서른 즈음에서야 놓는 법을 조금 배웠고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참, 두꺼비집 노래에서 사실 헌 집은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를 뜻하고 새집은 새 삶을 살아갈 아가를 뜻한다고 한다. 마음이 괜스레 알싸하다. 이 노래를 자장가로 계속 불러야 하나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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