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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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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Jul 12. 2020

당신이 생각하는 실패란 무엇인가요

육아하는 엄마에게 실패란




첫 문장을 무엇으로 할까 고심합니다.

‘나는 실패한 적이 없다’와 ‘나는 매일 실패한다’ 사이에서 말이지요. 실패한 적이 없다고 쓰기엔 양심에 찔리고 매일 실패하고 산다기엔 희망과 가망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조차 없습니다.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으로 인한 일들을 실패의 범주에 넣어야 할지 10개월 된 아기의 밥을 먹이기 위해 매일 벌이는 소란 역시 실패의 하위 항목 일지 헷갈립니다. 좌절했던 수많은 순간이 떠오르지만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실패란 무엇인가요. 단순히 성공의 반대, 추락한 괴물인 걸까요.           



늘 어딘가 조금 다른 해석법을 가진 저에게 실패라는 단어 역시 애매모호합니다. 사전 속 정의인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거나 뜻한 대로 되지 않고 그르침’도 영 시원찮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우린 매일 실패하는 셈입니다. 기다리던 비가 오지 않거나 원하던 서니 사이드업 sunnys ide up이 스크램블로 변하게 되는 일은 허다하니까요. 다행도 행복이라며 위안을 얻는 우리에게 원하는 결과를 매번 얻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인 것만 같습니다.       

    

만약 실패가 사전 그대로의 의의라면 현재 제 인생은 매일 실패 그 자체를 달립니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거든요. 이제 막 10개월의 생을 산 우리 딸 아윤이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자의식을 뽐냅니다. 어쩌면 꼭 그리도 제 마음을 읽고 그 반대로 행하는지 놀라울 지경입니다. 일부러 늘어놓은 각색의 장난감은 본 척도 않고 잠시 사용하기 위해 꺼낸 드라이버에만 집착을 하거나 어느새 떨어진 작은 단추를 입으로 쏙 넣곤 앙다문 입술을 열지 않습니다. 복숭앗빛 철옹성은 무슨 방법을 써도 열리지 않아 결국 그 후 매일 아기의 똥을 확인하며 동그란 플라스틱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하루 세 번 먹는 이유식 시간은 또 얼마나 실패의 연속인지 그까짓 밥이 뭐라고 못난 엄마는 오열을 하며 분을 삭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이유식 숟가락만 들어도 생떼거리를 내며 우는 아기에게 밥을 먹이는 일은 마라톤 완주를 한 것과 같은 탈진을 몰고 옵니다. 별책부록처럼 딸려오는 자괴감과 함께요. 이 좌절의 감정이 실패의 그것이라면 저는 매일 세 번의 정기적 실패를 맞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아기를 낳는 그 시작부터 실패했습니다.

터진 양수의 시간제한과 진통 강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제왕절개를 선택했으니까요. 자연 분만을 고집한 적은 없지만 예상치 않던 수술이었기에 씁쓸한 뒷맛은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내내 절 따라다녔습니다. 특히 엉금엉금 기어 다니던 제 뒤에서 나타난 자연 분만한 엄마가 표홀히 앞으로 사라질 때는요. 물론 요즘은 제왕절개도 다만 하나의 분만 방식이라 불리지만 열 시간에 가까운 진통을 하다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은 개운하지만은 않은 법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도전과 노력을 하다 넘어지고 일어났지만 육아만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점점 제 자아를 의기양양하게 드러내는 작은 인간 앞에서는 미숙한 엄마는 점점 속수무책이 되어버립니다.

다시 묻습니다. 제가 겪는 이 모든 처음의 순간은 실패의 순간들인가요?          



제가 정의하는 ‘실패’는 ‘넘어짐’이란 시시한 동사입니다. 시시했던 만큼 셀 수 없는 도전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이지요. 아윤이가 하루 수십 번 넘어져도 아랑곳 않고 발딱발딱 일어나 걷기 연습을 하는 것처럼요. 문득 오뚝이 같은 우리 작은 아가의 처음을 떠올려봅니다. 세포분열 때부터 지켜봤던 아가의 시작을요. 착상 후 배아(태아)였던 아윤이에겐 심장부터 생겼습니다. 의외였지요. 팔과 다리나 눈이 먼저 생기는 게 아니라 엄청난 속도로 뛰는 심장부터 인간에게 먼저 달리다니. 힘차게 뛰는 심장소리를 듣고 묘한 감정에 휩싸여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 심장이 먼저 생기는 것엔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그 일정하고도 묘한, 터질듯한 심장박동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듣는 것이 이렇게 감격스러운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 경험 이후로 어렴풋이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가슴 뛰는 일을 하라',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태초부터 명 받은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다시 나름의 정의를 수정합니다. 내게 있어 '실패'란 '가슴 뛰는 일을 하다 넘어짐'입니다. 



아윤이는 매일 일어서기와 걷기 연습을 위해 넘어지고 저는 그와 함께 넘어지고 일어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소소한 일상과 부딪히고 좌절해 기진맥진 상태로 잠에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그 모든 것이 실패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껏 '넘어진' 모든 어제의 일들 역시 말이지요. 다시 일어서서 양 발에 균등한 힘을 주고 몸의 균형을 맞춰 다시 천천히 걸어 나가면 되니까요. 제가 거창한 이름의 실패를 한 적이 없는 까닭입니다. 



며칠 전 역시나 온 바닥과 매트, 아기 의자에 밥칠을 하는 이유식 실랑이를 하고 먹이는 고달픔에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었습니다. 혹시 그 감정이 전해질까 부엌 구석에 쪼그린 채 말입니다. '난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엄마로서 벌써 실패한 건 아닐까.'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집안 곳곳에 붙은 밥알을 떼내며 심호흡을 했지요. 넘어지고 바로 일어나는 아윤이처럼 나도 툴툴 털고 일어서야 하니까요. 육아에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잠시 쉼표를 붙이고 다시 이어가야 합니다. 자연스레 들이고 내쉬는 호흡처럼요. 

벌건 눈으로 책을 정리하자니 어느새 아윤이가 곁에 와 있습니다.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짓고요. 자식의 맑은 웃음에 당할 부모가 있을까요. 금세 배를 간질이곤 함께 드러눕습니다. 천장을 보고 서로를 다시 보고 또 웃습니다. 우리의 뭇웃음에 또다시 가슴이 뜁니다. 



아무리 문장을 써 내려가도 도무지 첫 문장을 무엇으로 할지 못 정하겠습니다. 

저는 매 순간 실패를 하고 있는 건가요, 실패라는 거대한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걸까요. 

아니 그 무엇보다 당신이 생각하는 실패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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