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기와 나

178일째의 고백

육아일기 아닌 육아일기

by 윤신




2019년 8월 31일의 한낮.
은빛의 날렵한 날이 가른 붉은 선 사이로 아가는 새 숨을 토해냈다. 그 숨은 낯선 세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가득 찬 울음이었을까.


사실 난 그 울음을 품 안이 아닌 손바닥만 한 화면에 그가 녹화한 영상을 통해서 들었다. 물론, 요즘은 제왕절개 수술이라도 부분마취를 하면 수술 직후 아기를 바로 안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화면 너머로 아기의 첫울음을 들을 수 있었던 건 수술 직전 간호사를 붙들고 한 말 때문이다. 무감각한 아랫배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상상(귀로 들려오는 소리는 상상의 폭을 키운다)과 차가운 수술용 침대가 건네는 기억, 그리고 천장에 붙은 거울로 인해 공포에 가득 질린 내가 더듬은 그 한마디.
"저, 저, 잠자고 싶어요. 수술할 때 자고 있을래요."


흠뻑 젖은 손으로 그녀를 잡곤 덜덜덜 떠는 목소리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때 그 간호사의 눈빛은 어땠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마주 잡아준 손만은 따뜻하게 남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다. 새벽부터 참아낸 진통이 결국 수술로 이어지다니. 심지어 그 전날까지도 순산을 위해 골반 열어주는 요가 자세를 그렇게나 했는데 말이야.


가끔 K 군에게 말한다.
"나 수술 안 하고 좀 더 버텨볼 걸 그랬어."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한다.
"그 고통을 벌써 잊었구만. 백번 잘한 선택이었어. 돌아가도 다시 그렇게 할걸?"
흥. 쓸데없이 이성적이다.


사실 그가 옳다는 것쯤 알고 있다. 그때의 통증은 태어나 처음 겪어본 상상 이상의 것이었고 7시간의 촉진제에도 자궁문이 열리기는커녕 아기는 조금도 내려오지 않은 데다 양수까지 이미 진작에 새고 있는 상태였다. 참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란 걸 그때도 지금도 안다. 하지만 이미 지나고 나니 온갖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다.


엄마로서 갓 태어난 아가를 안아줬어야 했는데.
양수가 새기 전날까지 순산을 위해 하던 모든 운동은 부질없는 짓이었나 (출산 후 회복에는 큰 도움을 줬습니다만).
자연분만을 해야 아기가 산도를 빠져나오는 마지막 순간에 유산균으로 샤워해서 면역력이 좋아진다던데.
아가는 좀 더 뱃속에 있고 싶었는데 내가 무리했던 걸까. 그래, 그래서 양수가 샜을지도 몰라.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지만 다들 말하듯 결국 아기가 나오는 시기와 방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아가만이 '언제'와 '어떻게'의 빈칸을 채울 수 있다. 물론 아기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생리통이나 자궁경부암 수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독하고 지리한 진통에 백기를 먼저 든 것은 사실이다. 그 생각이 또 자꾸만 끊어진 꼬리를 문다. 조금 더 참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연분만으로 아기를 낳거나 하다못해 부분마취를 선택해 까무러치듯 우는 아기를 안아줬다면 어땠을까.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만약 그 상황이 다시 반복된다면 난 어김없이 똑같은 백기를 들고 간호사에게 기절시켜달라 애탄 눈빛을 보낼 거다.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달콤한 축복, 망각이 아직도 가끔 후회를 부추긴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엄마에게도 어쩔 수 없는 고통을 피할, 아니 최소화할 권리쯤이야 있지 않은가.
나에겐 나도 소중한 존재다.

그리고 그건 아기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라고, 난 생각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매일 일기를 쓴다.
아기와 함께하는 하루들을 기록한 것이니 육아일기라고 부를 법도 한데 왠지 양심에 찔려 '육아'라는 단어를 묵음 처리시켜 버린다. 쓰다 보니 모든 글이 아가에 관한 것도, 찹쌀떡 군에 관한 것도 아닌 내 얘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와 아기, 나와 찹쌀떡 군, 나와 엄마 그리고 우리.


모든 곳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아기가 아닌 나이기에 '육아 일기'라 부르기엔 좀 어폐가 있다. 물론 이 기록은 나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언젠가 커서 읽게 될 아가, 함께 살지만 대체로 다른 하루를 보내는 그, 혹시 기회가 된다면 읽을지도 모를 엄마, 그리고 나와 닮은 감정을 가진 누군가를 위함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철학자, 김진영의 글처럼 ‘모든 일은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지고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글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타자를 위한 것이 될 때 글은 단단해지고 확실해질 것이다. 일기도 매한가지 아닐까.


아기가 태어나 쓴 첫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퐁당, 빠지는 게 사랑인 줄 알았더니 잠잠한 물살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솜사탕 같은 것 역시 사랑이구나.' 아가를 낳은 지 삼 일째 되는 날의 일기다. 그러니 저 문장은 아가에 대한 나의 ‘첫’ 사랑 고백인 셈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일기들은 고백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기만큼 나를 사랑하는 한 엄마의 고백,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고백, 하루의 고백, 지난날의 고백.


지난 8월부터 이어온 178일째의 고백이 오늘도 이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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