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0
책을 좋아합니다.
열 살부터 시작한 짝사랑을 고백하듯 몇 번이나 글로 쓴 얘기지만 늘 충분하지 않아요. 내 눈에 비친 아가의 사랑스러움은 아무리 해도 카메라에 담을 수 없고 잠든 아가를 보는 몽글몽글한 마음을 도무지 그대로 형용할 수 없는 것과 같아요. 그 어떤 수단으로도 말끔하게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거라곤 툭하면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수밖에요. 제한된 시간과 장소 아니, 인생에서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나의 생을 나눠주는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아마 책을 좋아하는 방식을 나열하자면 방 한 면 가득 차지한 책꽂이에 꽂힌 책만큼이나 될 것입니다.
책등을 쓰다듬는 것,
작은 독립서점에 갈 때마다 스르륵 목차를 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씩 모으는 것,
책마다 다른 면지의 차이를 손끝으로 헤아리는 것,
책을 좋아한다고 얘기하길 좋아하는 것,
오래된 서점의 콤콤한 종이 냄새를 맡는 것,
누군가에게 아끼는 책을 건네는 것,
한번 읽었던 책을 꺼내 다시 읽어보는 것,
보물 찾기처럼 집안 곳곳에 책을 두는 것,
어딘가에 조그맣게 책의 부분을 옮겨 적는 것.
잠깐의 생각에도 책을 좋아하는 방식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이어집니다.
나의 딸이 나와 같기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큽니다. 원래 그렇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어떤 사소한 교감과 일상적인 공유를 하고 싶은 바람 같은 것이겠지요.
또한 내가 종이에서 찾은 반짝이는 세계를 아가도 찾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물론 전혀 다른 모습의 세계겠지만 괜찮습니다. 책이라는 같은 은하수 아래일 테니까요.
아윤이의 시야가 또렷해지기 전부터 초점책을 아기 침대 곁에 펼쳐놓았습니다. 초점'책'이라고 해봤자 까맣고 하얗고 드문드문 색이 입혀진 사물의 모양이 있는 리플릿 꼴이지만요. 이제는 가끔 아가가 누워 바둥대는 오른쪽, 왼쪽 인형 사이에 책을 한 권씩 눕혀 두기도 하고 작은 병풍처럼 세워두기도 합니다.
익숙해진 탓인지 명화가 그려진 책을 보면 반가워하며 배를 힘껏 밀고 닿으려 하기도 합니다. 은지 이모가 선물해 준 그 책에선 노랫소리가 나오거든요. 꽤나 마음에 드는 듯 엎드려 책을 펼치곤 고 벚꽃 빛 입술을 앙 다물고 조그마한 손으로 책 끝을 쥔 채 집중합니다. 구태여 쥐여주지 않아도 누워서 책을 들곤 신문 읽는 아저씨 포즈로 근엄하게 쪽쪽이를 물며 보기도 하지요. 제 몸만 한 책을 잘도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202일의 삶을 살고 있는 아가지만 엄마로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아윤이도 책을 좋아합니다.
물론, 그 방식이 저와는 조금 다릅니다.
아가의 모든 독서의 목적과 끝은 '챱챱챱'이거든요. 온갖 물체가 아가의 입으로 향하는 지금, 책이라고 별다르지 않습니다. 결국은 모두 입으로 가져가기 위한 순서였던 거지요.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제가 미처 알지 못하고 하지 못한(할 생각도 없습니다만) 책을 좋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네, 맞습니다.
어쩌면 이건 눈에 콩이 아닌 책 꺼풀이 씐 엄마의 궤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책을 물고 빨기를 좋아하는 것'도 결국은 책을 좋아하는 것 아니겠어요. 주어와 서술어 사이 목적어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주어의 몫일뿐 문장 밖에서 지어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오늘도 아가는 몇 권의 책에 침을 가득 묻혔습니다.
앙! 물고 챱챱챱, 넘기거나 뒤집고 다시 챱챱챱.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아주 바쁜 하루를 보냈어요.
좋아요. 그걸로 좋습니다.
말했듯, 책을 좋아하는 데는 수많은 방식이 있는 법이니까요.
우리 아가가 조금 더 크면 책으로 탑 쌓는 재미를 알려줄 예정입니다. 좋아하는 색의 책을 골라 쌓기도 하고 넘어트리기도 하는 거죠. 할 수만 있다면 작은 오두막처럼 만들어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책을 하나의 친구처럼, 장난감처럼 만들어주고 싶어요. 내 외로운 한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정작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더라도 괜찮습니다. 책을 만지고 쌓으며 함께 보낸 시간이 남아있을 테니까요. 그 시간은 알알이 우리의 안에 맺히겠지요.
가만히 적다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책 보다 사람인가 싶습니다. 힘든 시절 책 보다 더 내게 의지가 되고 웃음이 되었던 건 사람이었구나, 하고요. 당연한 얘기겠지만 또 이런 순간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일상적이고 평범한 진리가 다시금 머릿속 종이 울리듯 퍼지는 순간이.
첫 문장을 수정하겠습니다.
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책보다는 역시 사람입니다.
왠지 불쑥 그렇게 적고 싶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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