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2, 머물듯 지나간다
뜨거운 물줄기에 늘어진 피로를 흘려보낸다.
투명하고 부드러운 곡선이 나른한 오후를 깨우고
몸과 마음에 오려던 감기는 슬쩍 뒷걸음질 친다.
산책과 뜨거운 샤워는 우울에도 무기력에도,
그리고 어쩌면 감기 예방에도 좋을지도 모른다고 적어 둔다.
고양이의 가는 털을 말리듯
부드럽게 털어 머리를 말리다 이내 손을 멈춘다.
-아가의 젖은 머리는 수건으로 몇 번만 슥슥 만지면 금방 마르는데-
긴 머리를 말리는 일은 감는 것보다 훨씬 많은 공이 든다. 그냥 다시 단발로 자를까 생각하다 또 이내 고개를 젓는다. 짧은 머리를 관리하는 일은 긴 머리보다 훨씬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알고 보면 일상의 그 어느 선택도 쉬운 게 없지.
괜히 하늘로 솟은 잔디를 닮은 잔머리만 손가락 사이로 쓸며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냥 머리를 더 말리면 될 일이다.
거울 너머 비친 맨몸의 배꼽 아래엔 손바닥 한 뼘도 되지 않을 가는 상흔이 있다. 딱, 아가의 발바닥만 한 길이다.
세상에 첫 숨을 토해낸 작은 사람의 역사이자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내 몸의 출산의 기록이다.
‘아가.
인생에 정해진 길이란 없어.
넌, 무어라도 될 수 있고 무어나 할 수 있지.
첫 너의 인생길도 그랬어. 애초에 정해진 길이 아니었단다.’
며칠 바람이 세고 차다.
공기는 집이 가진 모든 네모진 유리창을 두드리며 연신 노크를 해댄다.
이참에 잠시 온 집안의 환기라도 할까, 베란다 문을 여는 찰나
오디세우스가 바람의 신에게 받은 주머니라도 풀어진 듯 거친 바닷바람이 밀어든다.
에취.
여전히 젖은 머리를 털며 바람이 들어올 자리를 닫는다.
다시 머리를 말려야겠다.
까르르-
별안간 뒤에 동그마니 앉은 아가가 내 재채기 소리에 웃는다. 이제 제법 자란 머리칼은 둥글게 위로 뻗쳐있다.
눈이 마주치곤 다시 까르르-
그래, 네가 웃으면 그걸로 좋다.
다시 한번 에취.
또다시 터지는 풀 내음 같은 웃음.
아기의 웃음에 찬 기운이 훠얼훨 저 멀리 날아간다.
산책과 뜨거운 샤워도 좋지만 그것보다 아가의 웃음이
우울에도 무기력에도 어쩌면 감기 예방에도 더 좋을지 모른다, 고 다시 적는다.
아가의 웃음 뒤로 바라본 하늘은 딸기 셔벗 색으로 천천히 물든다.
유난히 바람이 불던 하루도
이렇게
여전히
지나간다.
뜨거운 샤워와 젖은 머리와 바람과 배 아래의 상흔, 그리고 아가의 웃음이 머물던 자리를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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