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9, 환절기와 옷정리는 동의어
비가 온다.
아침부터 연회색 얼굴로 일관하던 하늘이었다. 창 너머 난간 아래엔 송골송골 하늘의 땀이 줄을 지어 맺혀 있다. 손끝으로 툭, 치면 실로폰 소리를 내며 떨어질 것 같아 손가락을 대볼까 하다 이내 등을 돌린다. 가끔은 무언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는 법이다.
1초마다 460m씩 움직이는 부지런한 지구의 자전 속 나른한 오후가 지나간다.
아마도 아직 봄이라 부를 수 있는 사월의 한가운데.
어제는 옷 정리를 했다.
이사하고 쳐다도 보지 않던 옷장의 옷을 한꺼번에 꺼내 털고 계절별로 분류했다. 용기를 내어(정말이지 '정리', 특히 '옷 정리'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옷장 문을 열게 안산 가족 덕이다. 그들은 이삿날에도 와서 온 집안의 먼지와 사투를 벌였는데 못내 그날 마무리하지 못한 옷들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마음 써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은 극도의 겸양이다. 행동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을 체감하는 '충분한' 조건인 것이다. 우리는 더 자주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곁에 있어야 한다.
아버지와 언니는 아가를 담당하고 어머니와 난 쌓인 옷을 담당했다.
옷장의 옷을 다 꺼내고 보니 구제 가게와 별반 다를 게 없구나 싶던 찰나 아버지가 말한다.
"꼭 옷을 다 펼쳐놓은 모양이 구제 가게 같구먼."
찌찌뽕. 물론 나는 깡통시장을, 그는 광장시장이나 동묘를 떠올렸겠지만.
옷 속에 파묻히면 사람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 넓은 동산이 생겼다. '언젠가 입을지 모를' 옷들이 '자주 입는' 옷들보다 수북할 그 동산을 파내기 시작했다. 한 벌 한벌, 오늘 끝내지 않으면 이 동산에 내가 정말 묻힐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모든 일은 때가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조급한 마음을 어느 정도 위로하는 말.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 늘 그 자리인 미완성의 무언가(혹 누군가)에게 다정히 건네는 말.
내 평생 끊이지 않던 크고 작은 소란이 한 사람의 등장과 함께 사그라들고, 엉덩이에 불붙은 듯 온 세상을 뛰어다니던 내가 아윤이를 낳고 제자리를 지키는 법을 알게 되었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풍랑은 어느샌가 잠잠해지고 든든한 두 개의 돛이 생겨 나와 함께 항해한다.
모진 바람에 선 자리를 지켜야 할 때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힘껏 내달려야 할 때는 다 있는 거라고, 절대적이진 않지만 역시 모든 일엔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켜켜이 쌓인 옷을 한벌씩 꺼내며 생각했다.
옷 정리도 때가 있다.
계절이 바뀌는 시간, 마음이 내키는 시간, 이사 뒤의 시간, 너무 심심해서 뭐라도 하자고 맘먹은 시간,
그리고 시어머니가 함께 도와주는 시간이 그렇다.
안산 어머니는 오랫동안 옷 가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다. 육아든 커피 브루잉이든 옷 정리든 경력은 필살기다. 든든한 마음에 게으른 마음을 떨쳐낸다.
둘이서 하는데도 먼지 가득한 방에서 묵은 옷들을 정리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그동안 지구는 얼마나 먼 거리를 움직였을까. 아니, 그나마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에 끝낸 게 다행이지. 이 힘든 걸 다 끝냈다는 뿌듯함이 밀려드는 찰나, 아윤이 옷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엄마와 살 땐 엄마가 계절마다 옷 정리를 해줬기에 옷 정리가 환절기와 동의어라는 걸 미처 몰랐고 혼자 살 땐 내 몫의 옷만 여기저기 구겨 넣고 펼쳐놓다가 입으면 되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빨래도 옷도 두 배가 되었고 작년 가을의 시작 즈음부턴 정리해야 할 옷의 분류가 하나 더 늘었다. 내 옷의 반만 한 작고 색색의 옷들이다. 다시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아기 옷장을 마주한다. 흡- 큰 숨도 들이켠다. 일단은 당장 입는 옷(내복)과 옷걸이에 걸린 옷만 정리한다. 뭐든 천천히 천천히. 문득 정현종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덧붙인다. 심지어 평생의 옷도 함께 오기 때문이다.
미루던 일을 (안산 가족 덕에) 끝냈다는 안도감과 피로로 오늘은 종일 늘어진 상태다.
비가 내리는 탓도 있을까. 다시 한번 창밖을 본다. 빛이 어둠에게 자리를 내주어 점점이 켜진 불빛에 꼬리가 달렸다. 저 꼬리가 차츰 길어지다 꺼지고 나면 또다시 아침이 찾아들겠지. 하루가 지나간다. 지나가고 있다.
어제는 감사한 하루였다.
오늘도 감사한 하루다.
다만 다른 거라곤 '비'라는 실체화된 수증기뿐이다.
아마도 내일이면 그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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