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기와 나

흰머리에 대한 단상

20200415

by 윤신




변명이 아니다.

작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임신하고부터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었다.


'걱정 말렴, 그 둘은 상관없으니.'


친구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비만과 임신도 아니고 흰머리와 임신은 무관하다는 것이다. 경험자의 딱 부러진 말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래, 어쩌면 그저 나이와 임신, 흰머리의 세 쌍곡선이 만난 우연의 일치일지도 몰라. 마음이 슬금 기울다 도리도리 고개를 흔든다. 내 몸은 타인이나 기계보다도 나의 눈과 몸의 긴장이 먼저 눈치채는 법이다. 한 번의 임신을 한 경험자로서 확언한다.(그렇다. 나 역시 경험자다.)

은빛이 도는 이 머리칼들은 작년부터 땅거미가 진 뒤 일제히 빛나는 가로등 불빛처럼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혹은 말 그대로 비 온 뒤 여기저기 솟는 흰 죽순처럼.



생각해보니 내 나이 열 살 즈음엔 엄마의 흰머리를 빌미로 용돈을 벌곤 했다. 한 가닥 당 십 원이었던가 오십 원이었던가. 시간이 쌓여 누레진 베개 위 엄마의 머리를 오른쪽, 왼쪽 그리고 앞, 뒤 살피며 열심히 족집게로 파헤치던 나는 그것을 머리 뿌리 쪽에 최대한 가까이 잡고 당겨야 쑥-하고 시원하게 뽑아진다는 것을 곱셈 나눗셈보다도 먼저 배웠다. 유난히 머리 뿌리가 굵은 머리털은 낚싯대에 걸린 대어처럼 잡을 때부터 손끝의 입질이 다르다. 감각을 조준해서 뽑는 순간, 명치께에서부터 손끝까지 가벼운 전율이 인다. 희고 투명한 타원형의 뿌리가 깨끗이 뽑힐 때의 쾌감이란...! 그렇게 매번 뿌리까지 깔끔하게 뽑힌 흰 머리카락들을 까만 리모컨 위에 자랑스레 전시하곤 했다.

하지만 사람은 애초에 실수하도록 설계된 동물. 보통의 극을 달리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가끔은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을 뽑기도 했다. 때론 흰머리와 함께, 또 어떤 땐 죄 없는 까만 머리만 한 가닥 혹은 몇 가닥.

그럴 때마다 엄마는 십 원인지 오십 원인지를 깎았던가 어쨌던가.



내 나이 열 살 즈음이었으니 아마 엄마 나이는 서른 살 즈음이었을 테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니 뽑았지. 지금 내 나이면 아까워서 뽑지도 못하지.'

모낭 하나에서 나는 머리카락은 일생 동안 25개에서 35개 정도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머리카락 한올을 뽑아버리면 그만큼 모낭의 수명이 짧아지는 셈인 것이다. 더 오래 살 수 있는 머리카락의 수명을 색이 다르다고 굳이 뎅강 베어버릴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아깝다. 모발 부자는 아니더라도 모발 적자는 면해야지. 그리고 흰머리가 이미 난 걸 어쩌겠는가. 자기도 살겠다고 자꾸만 자꾸만 자라는데.(그러고 보니 자궁에 암세포가 자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치료 후 또다시 재발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치솟은 감정을 삭히고 똑같은 생각을 했다. '어쩌겠어. 저도 살겠다고 자꾸만 자꾸만 재발하는데.' 난 공감능력이 좋은 걸까, 포기가 빠른 걸까.)



이 모든 생각의 뿌리는 어제다. 찹쌀떡 군 머리의 삐죽이 난 흰 머리카락들을 잘라준 것이다. 그게 우리 집 방식이다. 쪽가위 같은 작은 가위로 머리 뿌리 근처에서 짧게 자른다. 눈속임의 가지치기일 뿐이지만 일단 눈에 띄지 않고 뿌리째 뽑지 않았으니 모낭 수명에는 영향이 가지 않는다. 아직 무리 짓지 않은 흰머리를 염색하기도 그렇고 그냥 두자니 까만 가운데 제 홀로 빛난다.

아, 홀로는 아니지만.



단호하던 경험자 친구는 몇 년 전, 그러니까 아직 서로의 흰머리의 발견에 놀라워하며 호탕하게 뽑던 때 이렇게 말했다.

"남자면 몰라도 여자가 흰머리를 그대로 두면 좀 그래. 게으른 느낌이랄까."

그때 난 동조를 했던가 어쨌던가. 뭐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뭐 대순가 싶다. 자신을 아끼는 방법은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가지가 있을 테고 흰머리를 두든 염색을 하든 저마다의 방법일 뿐이다.

그 당시엔 친구의 말에 곧 머릿속에 몇 장의 사진들이 떠올라 그녀에게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 눈밭을 닮은 백발에 싱그럽고 밝은 여자들의 면면이 담긴 포트레이트였다. 사진을 슬쩍 보던 친구는 어깨를 으쓱한다.

"에이, 이건 외국인이잖아. 한국인은 이렇게 안돼."

아, 그런가? 하고 대답을 했던가 어쨌던가.

하지만 지금 보면 한국인인데도 강경화 장관은 저토록 멋있지 않은가. 만약 이 얘기를 그 아이에게 한다면 또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있는 자리(지위)가 흰머리까지 멋있게 보이게 만드는 거야."

저마다의 방식을 타인이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들춰보면 다른 데보다도 머리 양쪽의 귀 윗부분에 흰머리가 많이 난다. 이 부분 두개골 아래의 뇌를 많이 쓰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쪽가위로 잔디 깎듯 짧게 자른다. 그러다 불현듯 '난 딸에게 흰머리 뽑기를 시키지 못하겠구나' 하는 마음에 조금 아쉽다. 아윤이는 까만 리모컨에 머리카락 한 가닥씩 올려놓으며 십 원, 이십 원, 삼십 원 쌓이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겠지. 그리고 나는 볕 좋은 날 고양이처럼 바닥에 누워 꼬막손이 신중을 기해 쑤욱 한 가닥씩 뽑는, 그 시원한 쾌감을 알지 못하겠구나.

아윤이가 열 살 즈음의 난 흰머리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는 탓이다. 아윤이의 피어오르는 열 살을 생각하다 그 곁의 나를 떠올리니 잠시 아득해진다. 이제 막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었을 나의 아가와 그 옆 흰머리 소복한 엄마라니. 열 살 아이는 흰머리의 멋진 여성이 되고픈 어른의 로망을 알 길이 없으니 언젠간 내 딸을 위해 알뜰살뜰 염색해야겠구나 싶다. 커다란 비닐을 어깨에 둘러싼 나의 엄마에게 내가 꼬리빗으로 까만색 염색약을 발라줬던 것처럼 아윤이도 내 짱배기('정수리'의 대구 말)에 까만 염색약을 발라주겠지. 그리고 내가 그랬던 실수를 아가도 똑같이 할지 몰라. 머리칼이 아닌 귀, 목, 심지어 어깨에 정성 들여 까맣게 염색하는 아가를 생각하니 불쑥 웃음이 난다.



알 수 없지만 언젠가 확실히 다가올 우리의 내일을 생각하는 건 설레는 일이다.

일단, 아윤이가 염색해 주는 건 아빠의 머리가 훨씬 짧으니 아빠 머리로 먼저 연습을 시키는 걸로 해야겠지만.

아아, 세상에. 그때의 우리라니.




+덧붙여


이 글을 쓰고 며칠 뒤 어느 짧은 기사에서 작년부터 스멀스멀 자라난 내 흰머리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갑상선 질환이 생기면 흰머리가 잘 생긴다는 것이다.

'갑상선은 체온을 유지하고 몸의 대사를 조절하는 신체기관인데 이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멜라닌 색소를 만드는 세포의 기능도 함께 떨어지므로 결국 머리카락을 하얗게 만든다.'

이것 봐, 이것 봐.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커트 보니것이 쓴 대로 '여자는 커다란 몸의 아주 작은 공동 속에 아기를 위한 재료를 모아'(남자는 자기 몫의 기여를 하고) 아기를 만들고 아기는 곧 그 여자 몸의 방정식이랄까 정렬을 모조리 바꾸어 버린다. 아낌없이 재료를 모은 탓이겠지. 뭐 물론 새로이 태어난 한 생명은 재료들을 초월한 존재지만은.


내 귀한 사람아, 늘 함께 건강하고 아끼자.

그리고 역시나 염색은 일단 아빠부터 해주는 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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