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기와 나

하늘 달빛길의 산책

20200424, 매일이 새로운 산보에 대하여

by 윤신




볕이 자다 깬 아가의 체온처럼 따끈하다.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다. 이렇게 공기가 푸른빛을 띠는 청명한 날은 살며시 유모차에서 아윤이를 꺼낸다.

벨벳 주머니에서 소중한 보석을 꺼내듯, 라피키가 라이언 킹 심바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듯 하얗고 동그마한 아가를 품에 안는다. 그러면 어김없이 아가는 까만 유리알 같은 눈을 반짝이며 파릇한 풀이나 선명한 꽃들을 제 작은 손에 쥐려 한다. 꼬막 같은 손을 산으로 바다로 하늘로 길게 뻗는다.


우리의 산책은 짧으면 한 시간, 길면 두 시간 반까지도 이어진다. 걷기 좋아하는 엄마 탓이다.
그러나 아윤이가 아니었다면 굳이 한낮이나 이른 오후에 산책을 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환한 빛 아래의 생명과 사물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기분 좋고 나른한 낮의 기운을 한껏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는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아쉬울 일이 없지만 만약 이런 시간을 몰랐다면 인생이 조금 맹맹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다 아윤이 덕이다.



한낮의 산책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새로이 알게 된 꽃의 이름을 외우(려 노력하)고 동네 골목의 이름을 알게 된다는 거다.

은하수로, 하늘달빛로, 하늘 별빛로, 숲쟁이로, 햇내로, 흰바위로, 모랫말로, 쪽빛 하늘로.

길을 돌고 걸으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동네의 신작로 이름들은 참 예쁘다. 어쩌면 길의 이름들이 하나같이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 같은지. 예를 들어, 오늘 우린 하늘 달빛로를 지나 하늘 별빛로를 거쳐 은하수로에 핀 봄꽃들과 헤엄치는 물고기를 봤다. 그저 동네 한 바퀴를 돈 것인데 길이름을 주욱 나열한 것만으로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일기가 아닌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문장이랄까.



길 이름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곳이 있다. 스트로베리 힐즈 Strawberry hills.

시드니에서 가장 좋아하던 레스토랑은 Jazushi(Jazz+Sushi라는 뜻으로 매일 라이브 재즈 연주를 했다)였는데 그 가게가 위치한 곳이 Strawberry hills였다. 직역하면 '딸기 언덕'이다. 평소 지명을 잘 외우는 편은 아닌데 그 이름은 한번 간판을 스치듯 본 것만으로도 워낙 상큼해 잊을 수가 없다. 그 동네 어디서도 딸기나 딸기 줄기, 심지어 길가의 뱀딸기조차 본 적 없지만 그곳은 언제고 내게 제철 딸기처럼 싱그럽게 남아있다.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이지만 기억 한 부분에 큰 자리를 차지하다 결국 언젠가는 이름만으로 남는 게 아닐까.


그렇게 우린 여느 때보다 힘을 낸 바람을 맞으며 집 뒤 좁은 골목을 산책했다. 햇살은 어제처럼 따뜻했고 길가의 작은 꽃들은 매일 봐도 새롭다. 몸을 기울여 익숙하지만 이름을 몰라 미안했던 꽃의 이름을 찾아본다. 조그마한 하얀 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봄풀의 이름은 '콩다닥냉이'다. 소리 내어 발음해 본다. 콩다닥냉이. 아기의 옹알이처럼 귀여운 발음이 새어 나온다. 늘 보던 길가와 매일이 새롭다.


몇 달이 지나도 우린 하늘 달빛로를 지나 하늘 별빛로를 거쳐 은하수로를, 아마도 오늘 지나온 그 길 그대로를 걸을 것이다. 아마도 그땐 아윤이도 제 발로 땅을 밟을지도 모른다. 한 발을 딛고 몸의 중심을 이동하고 또 다른 발을 디디며 고이 작은 발을 땅에 디딜지도 모른다.

그땐 또 얼마나 새로운 일들이 벌어질까.
얼마나 많은 발견을 하게 될까.


내 사랑아,
너로 인해 모든 날이, 매일이 새롭다.
부디 너도 그러하기를,
이 어여쁜 풀꽃과 길의 이름을 알아가며 하루를 살아가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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