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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Dec 14. 2020

80%의 육아일기는 한풀이와 궁시렁의 어느 사이

부모는 장거리 선수들


여자라는 생물은 아기를 낳았다고 해서 곤충이 변태 하듯 엄마가 되진 않는다. 

또, 열보다 길거나 짧은 달을 배에 품은 아기를 눈앞에 마주한다 해서 '오오, 내 아기'라는 탄성이라던가 뭉클한 모성애가 활화산처럼 뿜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엄마는 순간이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닌 이유다. 



임신과 출산 역시 쉽지는 않다. 임신하고서 늘 입에 달던 두 가지 문장이 있다. 이 힘든 걸 왜 아무도 제대로 얘기해 주지 않은 거야. 너도 빨리 임신하면 좋겠다. 전자는 이미 경험한 이를 향한 것이었고 후자는 아직 경험하지 않은 이를 겨냥한 것이다. 이 힘든 걸 혼자만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 어쩌면 그래서 다들 임신과 출산을 열매 맺은 꽃으로 미화하는 건지도 모른다. 힘든 건 함께 나누자는 마음으로. 

많은 이들이 임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부풀은 배가 떠오르겠지만 사실 13kg의 몸무게 증가 따위 임신하고 생긴 다른 모든 변화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니다(심지어 그 변화들은 출산 후에도 몸에 남는다).

하지만 무서운 건 지금부터다. 출산이 500m 단거리 달리기라면 육아는 42.195km의 장거리다.

육아는 하루, 한 달을 세어가며 정해진 그날을 기다릴 수 있는 개념의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는 '육퇴'란 단어를 자주 쓰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엔 영원히 퇴근도 방학도 없다. 아기가 잠을 자도 조마조마 그 근처에서 머물어야 하고 혹 곁에 없어도 마음 한구석에 빙글빙글 맴돈다.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며 어른이 된다면 아마 마음 쓸 일이 더 많으면 많았지 적어지진 않을 거다. 아, 갑자기 방금 마신 물이 체할 것 같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햇빛이 머리 한가운데로 쬐던 이른 오후, 평일이지만 그의 늦은 출근으로 시간적 여유가 생겨 산부인과에 다녀왔다. 임신하고 생긴 갑상선 호르몬 저하증 때문에 주기적으로 피검사를 하고 매일 같은 시간 약을 복용하는데 먹던 약이 이틀 전에 똑, 떨어진 것이다. 한 달 반치의 약을 받으며 집에 돌아오는 길 내 아래팔 만한 커피를 샀다. 흐물거리는 몸을 한 번에 깨우는 데는 카페인만 한 게 없다.



그가 회사로 향한 뒤 우리 모녀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아윤이의 왕국에서 장난감 놀이를 했다. 사실 말이 왕국이지 그건 부모의 안심을 위한 낮은 플라스틱 감옥이었다. 그리고 말이 장난감 놀이지 눈을 말똥히 뜬 아가 앞에서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하나의 쇼였다. 관중을 한 명으로 둔 특별한 쇼. 

하긴 내가 누구던가. 소싯적 수십 명의 어린이를 모아 두고 동화 구연도 하고 어린이 연극에서 헨젤과 그레텔의 엄마 역과 마녀 역을 동시에 맡았던 사람 아닌가. 난 배운 엄마답게 화려하고 다양한 목소리 변조로 계속 아기의 흥미를 조금도 떨어트리지 않았다-는 거짓말. 책장을 몇 장 넘기는 사이 아윤이는 이미 플라스틱 철창을 벗어나고 있었다. 작은 엉덩이를 씰룩이며 왼발 오른발 땅에 딛고는 쑥쑥 앞으로 잘도 기어 나갔다.

안돼, 요 녀석.



한참의 실랑이 뒤, 어느덧 아윤이의 밥시간이다. 간신히 이유식을 90g가량 먹이고 분유를 주려는데 몸을 활처럼 젖힌다. 요즘 들어 자주 그러는 행동이다. 만약 8개월 아윤이의 자기소개서를 쓴다면 '특기'란에 「몸을 활처럼 뒤집기」혹은「몸으로 '희번덕' 표현하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어김없다. 유연함을 자랑하며 한껏 몸을 뒤집고는 짜증을 낸다. 나의 재롱도 소용없다. 어르고 달래는 일은 진작 무용하다.

그래. 네 맘대로 해. 나도 밥 먹이길 단념하려는데 칭얼댐은 끊이지 않는다. 아빠랑은 여태 순둥하게 잠잤다던 아기가 왜 나에게는 이런 시련을 주는가. 엄마를 몰라보고, 아니 알아서 일까.

이 조그만 생물체는 내가 엄마라는 게 탐탁지 않은 건가.



원래 쓸데없는 생각일수록 꼬리가 잘 물린다.

생각의 꼬리를 끊어내려 공기를 환기시키듯 환한 바깥으로 나간다. 아윤이는 여전히 입을 삐죽이는가 싶더니 곧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구경하기 바쁘다. 5월이지만 아직 바람엔 차가운 기운이 돈다. 얇은 옷을 입은 탓에 다시 돌아갈까 잠시 생각하다 그만둔다. 이 분의 심기를 또 거스를 수 없지.

나간 김에 요깃거리나 살 겸 조금 긴 걸음을 택한다. 한 손에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 채로. 

"아윤이는 내가 싫은 걸까?" 

다짜고짜 속말을 했다. 


"남편이랑 있을 때는 그렇게 얌전하고 순둥 했다는데 나랑만 있으면 꼭 그렇게 짜증을 내."

"응?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우리 집 애도 그래요. 엄마가 제일 편하단 증거 아닐까요. 아, 근데 지금 애들이... 어디가~! 이리 와!"



황급히 끊긴 짧은 통화지만 '당연하다'는 말에 일단 안심한다. '엄마가 편하다'는 말은 어쩌면 '엄마가 만만하다'의 완곡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아윤이의 짜증이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게 중요했다. 나와 있을 때 유독 울거나 짜증 내는 아기를 보며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던 거다. 물론 아기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가장 긴 사람으로서 우는 모습을 자주 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난 엄마 자격미달 일지 몰라' 식의 감정에 휩쓸렸을 땐 둘만의 시간 비율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 두뇌 속 아윤이는 찹쌀떡 군 앞에서 생긋 웃다 내 앞에서 몸을 뒤집는 아기로만 연결될 뿐이다.



정 말 이 지 난 단 한 번 도 

내가 엄마가 될 거란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하고 다짐을 했다 한들 오늘의 현실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또 아무리 책을 읽었다 한들 그 책의 육아와 나의 것은 달랐을 것이다. 

만약 아직 '지금'을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내가 아기를 갖고 키우는 건 어떤 일이냐 오늘의 내게 묻는 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거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하지만 혼자의 삶이 활짝 핀 꽃이라면 아이와의 삶은 열매를 맺은 나무와도 같으니 너도 빨리 임신하면 좋겠다고.

과거의 나 역시 고통을 나누는 '함께'에서 예외로 둘 수는 없다.  



쓴 것을 되짚어 곰곰이 읽어보니 아까 적은 글에 오류가 있다. 출산이 500m 단거리 달리기라면 육아는 42.195km의 장거리가 아니다. 

평생 달리기다.

육아에 골인 지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자기 페이스대로 걷고 뛰고 다시 걸어야 할 일생의 달리기, 평생의 과업인 것이다. 

묵묵하고 셀 수 없는 걸음의 퇴적이 만들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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