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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Feb 09. 2021

살 냄새

기억을 담고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관하여


아가,
사람들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냄새가 있어.
생활에서 나오는 따뜻한 태도 같은 은유 말고 네 작은 코로 맡을 수 있는 실질적 감각 말이야.


추운 겨울 차고 마른 손으로 쥔 뜨끈한 어묵 국물의 냄새나
옆 뜨거운 난로에서 김이 모락 나는 노오란 군고구마의 달콤한 냄새,
그런 날 집에 돌아와 마시는 핫 코코의 단내. 

아마도 같은 순간, 

어스러지는 시간의 경계에서 퍼지는 시골 어딘가의 타는 냄새 같은.  

얼마 전 네가 처음 먹어본 수박도 시원한 단내가 있고
좋아하는 고양이들에게도 어딘가 골콤한 냄새가 나지.


조금 더 말해볼까. 
오래된 책을 펼치면 나는 노릇한 빵 냄새,
또 너무 오랜 책에서는 젖은 비 냄새,
껍질부터 풍기는 아가 닮은 복숭아의 과즙 향,

잔디가 잘린 뒤 짙게 흩뿌려지는 풀냄새,
먹지 않겠다고 버티던 나를 굴복시킨 아빠가 끓인 라면 냄새,
할머니가 직접 구운 김 위에 살짝 바른 참기름 냄새,
여름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기억이 설레는 냄새,
전등사 입구부터 스미는 은은한 향내,
달콤한 솜사탕을 떠올리고야 마는 자귀 꽃의 냄새,
탁탁 털고 난 햇살 섞인 마른빨래의 냄새,
갱년기로 힘들어하던 내 엄마의 입에서 나던 술 냄새,
너를 갖고 예민해진 후각에 결국 토하게 만들었던 고양이 똥 냄새,
가까이만 가도 풍덩 빠지고픈 푸른 수영장 물 냄새,
비 온 뒤 올라오는 콘크리트 도시 냄새,
밤새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딘가 후련하고 어딘가 서글픈 새벽 냄새,
뭐, 그런 냄새들.
기억을 담고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들.


그런 냄새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는 거야.
아윤이에겐 아윤이의 것이.
엄마에겐 엄마의 것, 아빠에겐 아빠의 것이.


아, 어쩌면 나보다 아가가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졸려서 그만 감긴 눈으로도 그렇게 엄마 품을 잘 찾아와 파묻는 걸 보면 말이야.
'냄새'라는 어른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겠지.  

그렇다면 혹시 이것도 아니?

하루에도 몇 번이고 엄마는 네 볼과 머리칼, 손바닥, 배, 어디고 깊게 깊게 숨을 마시며 냄새를 맡아.
꽃향기를 탐하듯 부드럽고 오래도록 말이야.
그 살 냄새가 얼마나 날 안정시키고 위로하고 감싸 안는지
그건 아마 모를 거야.  


네가 나에게 네 얼굴을 파묻듯 나 역시 틈만 나면 네게 얼굴을 파묻는다는 걸 말이야.
녹녹하고 밀도 있는 따스한 네 살 냄새에 폭,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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