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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Jul 21. 2021

그 모든 것과 그에 대한 예의

잘가, 편안한 곳으로 


어떤 것들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가슴 어딘가 잠겼다가 한 번씩 툭 하고 튀어나온다. 때로 그건 감정이거나 사람, 혹은 문장의 형태다. 그리고 가끔은 유월 초여름 동네 골목길의 바람벽에 고개를 내민 능소화와 그 사이의 햇볕이거나 아끼는 이에게서 받은 편지에 쓰인 몇 줄, 처음 아기가 '엄마'하고 정확히 발음했을 때의 감격, '코모레비 こもれび'(木漏れ日,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라는 뜻의 일본어)라는 단어가 주는 환함과 타국의 언어가 주는 생경함, 딱 한 번 지나친 모르는 사람과의 눈 맞춤, 헌책방에서 만난 반가운 책, 잠든 기억을 깨우는 그리운 냄새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그들의 방문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툭 하고 나와 쿵 하고 떨어질 때도 있다. 임신했을 때 끝도 없이 터지듯 떠올린 나의 유년시절이 그랬고, 한때 전부였으나 이제는 시시해져 버린 관계들이 그렇고 언제 들어도 낯선 누군가의 부고가 그렇다. 그렇다. 부고가 그렇다. 특히나 나와 살이 닿고(다만 뭔가를 전하려 스치는 순간이라도) 눈을 마주 보며 생의 시간이 겹쳤던 사람은 더 그렇다. 사진으로만 만난 얼굴과는 차원이 다르다. 말도 못 할 만큼 훨씬 더.

그리고 지금부터 쓸 이야기가 그렇다.



아이가 있으니 아이가 있는 집에 자주 놀러 간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윤이를 낳기 전엔 몰랐다. 선이 그어진 것도 아니고 노소를 차별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된다. 아이와 함께 있는 게 누군가에겐 부담일 수도 있다는 이유다. 여기서 그 누군가는 대부분 아이가 없이 홀가분히 지내는 이를 지칭한다. 홀가분하다는 것, 그 얼마나 이상적인 상태인가. 안온의 이상을 깨고 싶은 마음이 내겐 없다. 물론 아이와 다니는 것 자체로 의도치 않게 가끔씩 타인의 것을 바사삭하고 깨어버릴 때도 있지만. 어쨌든 얼마 전 아이가 있는 집에 놀러를 갔다. 아윤이와 나, 단둘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선배였기에 아이들을 재운 후 자연스런 수순으로 치킨에 맥주를 마셨다. 아줌마 아저씨의 모습으로 여전히 가슴속 어딘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스물을 이야기했다. 사이사이, 아이가 깨면 엄마들은 조용하고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뛰어들었다가 쉬이 쉬이, 술로 뜨끈해진 손바닥으로 다시 재우고는 더 빠른 걸음으로 식탁으로 돌아왔다. 대화는 잠시 휴식을 가졌다가 금방 그 시절의 감각을 회복했다.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꼭 서로 아는 얼굴의 이야기를 한다. 대학교도 마찬가지다. 잊고 있던 시절 인연이 떠오른다. 누구는 지금 엄청 잘 나간다지, 또 누구는 여전하다지, 그리고 누구누구는 결혼했다가 다시 돌아왔다지. 익숙한 이름이 오르내리고 새삼 지나간 시간이 세월처럼 느껴질 즈음 선배가 말한다.


혹시 그 친구 소식은 들었어? ***말이야. 일여 년 전에 자살했다던데.   


순간 멈췄다. 누구? 내가 생각하는 그 친구는 아니지? 에이, 그럴 리가 없지.


누구? ***? 그 후배는 아니지?


숨이 차오를 지경이 되어서야 멈췄던 숨을 토했다. 그 후로도 같은 질문과 같은 이름은 몇 번 반복되었다.

그 아이의 밝은 웃음과 재미진 사투리(사투리가 재밌었던 것보다 말재간이 좋았다), 그가 설명해 주던 김천의 정경이 떠오른 탓이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SNS 사진 속 염색한 머리가 너무도 예뻤던 탓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우린 그날 자정을 한참 남기고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마신 술 보다 마셔야 할 술이 냉장고에 가득했지만 대화는 더 이상 쉬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왜', '얼마나', '언제' 같은 의문사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왜일까. 우린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찾지 않던 딱 그 정도의 사이였는데. 잠에서 깨 방문 앞에 서서 우는 아윤이를 핑계로 식탁을 벗어나 아이의 곁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새벽 세시가 넘도록 천장만 보다가 늦은 안부를 허공에 보냈다.

미안해. 잘 가라는 인사가 늦었네.

또다시 김천의 풍경이 지나가고 난 뒤 잠든 아윤이의 손을 꼭 잡고 잠을 청했다. 아이의 들숨 날숨에 맞춰 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아가도, 잘 자.


 

그것뿐이다. 그 후로 우린 그의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누룽지 죽을 후후 불어가며 아이들에게 먹이느라 진땀을 뺐을 뿐이다. 긴 밤이 지나고 우린 돌아온 것이다. 눈을 뜨기도 전에 날 깨우는 아이와 자는 척 눈치싸움을 벌이고 밥을 먹이고 치우고 기저귀를 갈고 반복되는 생활로 말이다. 시시하고 별 볼일 없지만 나에게는 전부인 일상. 그런데 그 일상 가운데 이제는 가끔 그럴 때가 있다.

툭 하고 튀어나와 쿵 하고 떨어지는 때.

가본 적 없는 김천의 정경이 지나가고 스물 청춘이 이야기하던 꿈이 떠오르는 때.

불쑥 낯익은 얼굴이 고개를 내미는 때.



이제는 의문사가 소용도 필요도 없다는 걸 안다. 그대로 두자고 생각한다. 튀어 오르는 감정과 사람과 문장과 사투리를 그대로 두자고. 인정하고 바라보자고. 또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사라져도 기억하자고.

아마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자 그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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