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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May 12. 2022

보통 사람 일기

실은 다만 개인의 기록일 뿐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말에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말이죠. 그런 걸 궁금해해요. 유명한 작가의 생각이라던가 영화감독의 사생활이라던가, 혹은 의사나 철학가의 사상 같은 거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에세이를 읽고 싶어 합니다. 다른 세계나 차원에서 사는 사람들의 내밀한 삶을 염탐하고 싶은 욕구죠. 그런데 내가 사는 보통을 살고 있는 또 다른 보통 사람의 글이라, 음, 글쎄요. 그건 그저 개인의 기록, 일기죠, 일기.



하기야 그렇다. 생활하기 바쁜 이 세상에 남의 생각을 읽는다면 그 '남'은 분명 무지하게 매력적이고 막지하게 궁금한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저 무작정 쓰고 싶다는 열망만을 가지고 에세이를 쓰겠다니. 흥미진진한 사건도 남의 가슴이 다 설레는 로맨스도 없는, 마치 개미의 하루처럼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을 적어 누구에게 보인다니. 도대체 누가 그걸 볼까? 글쎄, 누가 볼까라. 그렇다면 나는 누가 보기 위한 글을 쓰고 싶은 건가? 정련된 예쁜 돌멩이를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건가? 건네는 건가, 던지는 건가. 애초에 그 돌멩이의 역할은 무엇인가. 잡동사니 같은 불투명한 생각들이 술래잡기하듯 얼굴을 드러냈다가 숨는다. 

음, 글쎄요. 그건 그저 개인의 기록, 일기 아닐까요?



경인선 책거리를 다녀왔다. 동네 작은 도서관의 주최로 그린 작은 두 점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다. 안내받은 주소가 두 개라 화면 속 지도를 손 안에서 굴리며 크고 작은 골목을 헤매던 중, 잘못 찾아간 곳에서 무료로 캘리그래피를 써주는 사람을 만났다. 어차피 서두를 것도 없지. 말 그대로 길 잃은 마음을 달래려 글자들 앞에 앉았다.

-거기 샘플들 중에서 문장을 골라 주시거나 혹 원하시는 글이 있으시다면 따로 적어주셔도 좋습니다.

두꺼운 앨범처럼 쌓인 글귀들을 읽어 내려갔다.

'꿈을 크게 꿔라. 그러면 깨지더라도 조각이 크다.', '수고했어, 오늘도.', '어차피 인생은 셀프.', '때로는 검색보다는 사색이 필요하다.' 붓 펜글씨에 귀여운 일러스트가 곁들여졌다. 이 의자에 앉았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상황과 감정에 맞는 글귀들을 골랐을 것이다. 짧은 문장은 가끔 한 권의 책 보다 더 스펙터클하고 긴 이야기를 갖고 있다. 뭘 골라야 하나. 몇 가지 문장을 손에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곁에 있던 친구는 마침내 하나의 문장을 손에 쥐었다.

'나는 네가 잘 되었으면 좋겠어.'

캘리그래퍼는 천에 주문처럼 글씨를 새겨나갔다. 적는 사람은 적는 사람대로 보는 사람은 보는 사람대로 스스로에게 주문을 새기는 참이었다. 잘 돼라. 잘 돼라. 뭐가 잘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돼라. 주문이 끝나갈 즈음 획, 하고 머리에 떠오른 글귀가 있었다. 바탕체로 프린트해서 책상 옆에 붙여두던  찰스 부코스키의 긴 시구절 가운데 한 문장이었다. 한글로 번역해서 적어도 되지만 밑받침 없는 간결함을 원했다. 짧은 영문장은 괜찮다는 말에 포스트잇에 글귀를 적어 내려갔다.

'I do not have time for things that have no soul.'

어디에 포인트를 주고 싶냐는 질문에 'time'과 'soul'이라고 말했다. 그게 아니면 무엇일까. 내 삶에서 시간과 영혼을 뺀다면 무엇이 남을까. 어린 시절 배운 주어와 동사, that 구절들을 와하하 이야기했고 그 시간은 알록달록한 알파벳의 모양으로 천에 남았다. 영혼이 없는 것들에 쓸 시간 따위 나에겐 없어, 찰스 부코스키의 터프한 진심을 나는 나대로 마음에 새겼다. 나는 내 마음이 담긴 것들에만 시간을 보냅니다.내 마음이 담긴 것들에만.



몇 번이나 작가에게 고개와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다시 갤러리로 향했다. 유쾌한 시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데다 일부러 서울까지 갔는데 고작 길을 잃었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정의 추가라 여겼다. 캘리그라퍼를 만나고 새로운 문장들을 읽고 큰 나무 아래의 가을길을 산책하는 서브 퀘스트 같은 별 볼 일 없지만 필요 불가결한 일상의 여정. 돌고 돌아 메인 퀘스트인 갤러리로 향하는 길, 친구에게 고백했다. 늘 그렇듯 난데없지만 언젠가는 쏟아내야 할 말들이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 내가 뭘 쓰고 싶은지. 아니야, 알긴 알지. 그런데 문제는 내 무능력이야. 아무 경력도 무엇도 없는 내가 쓴 글을 누가 읽겠어?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말이야. 그러자 가만히 나를 보던 친구가 말했다. 잘 쓰면 읽지. 누가 썼던 잘 쓴 글이면 누구라도 읽지. 눈을 몇 번 깜박이는 사이 뺨에 닿은 끝물의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차가웠다. 맞아. 잘 쓰면 읽지. 어쩐지 맥이 풀렸다. 당연한 말이었다. 사람 있고 글이 있지만 결국은 글이다. 누가 쓰든 잘 쓴 글은 어떡해도 빛이 나고 눈이 간다. 

그렇게 우린 헤맸던 만큼 걸어 갤러리를 찾았다. 맨 처음 이곳이 아니라며 돌아섰던 자리였다. 바로 앞에 두고 못 찾았던 건 이 길뿐만이 아니었겠지. 조금 단단한 마음으로 두 점의 그림 앞에 서서 사진 찍었다.



아마도 난 결국 내 마음이 담긴 것들을 기록하는 사람 이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수영하다 내뱉는 고른 숨, 단풍잎, 진갈색의 찻물, 섬, 나무, 따뜻한 라테, 사람들, 길고양이, 목도리, 책, 자카란다, 무거운 이불, 백포도주, 화분, 가지 요리, 미술관, 선풍기, 기억, 엄마와 딸, 그런 것들만을 말하고 또 말할 것이다. 그저 개인의 기록일 뿐인 단상들을 적고 수집할 것이다. 하지만 이왕 그럴 거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기록이지만 조금 더 힘을 불어넣고 싶다. 그러다 내 마음이 담긴 것들이 누군가에게 닿아 거기서 또 보통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면 그것 또한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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