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0, 성정설性靜說을 주장하기 위한
저는 인간이나 동물이 원래 조용한 생명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큰소리를 지르거나 야단스럽게 우는 사람을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없듯이 인간은 은밀하게 살아감으로써 자신을 지켜왔다고, 저는 믿습니다.
다니구치 지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잔잔한 물결치듯 그렸던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1947-2017)의 말이다.
'조용한 생명체'라던가 '은밀하게'라는 단어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저 글을 읽는 순간 정녕 그것만이 인간이 가진 최고의 선이자 내면의 힘이 아닐까 믿고 싶어 진다. 무작정 믿고 싶은 마음으로 성선설이나 성악설만큼 성정설性靜說을 가정한다. 왠지 그럴듯하군, 하면서.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문장 속 인간이란 단어를 그냥 어른도 아닌 '성숙한 어른'으로 바꾸는 전제 말이다. 이유는 사적이다.
태어난 지 294일 된 아윤이는 뚜렷한 일 인분의 인간이지만 전혀 조용한 생명체가 아니며, 나 역시 엄연한 한 명의 어른이지만 미숙한 이유로 매일 큰소리를 내는 탓이다.
'아기와 생활한 적이 있을까?'
주제넘지만 성정설을 주장하는(그렇지 않습니다) 멋진 문장을 보며 맨 처음 든 속말이다.
하루 종일 아기와 붙어 있다 보면 인간의 시조는 익룡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고음의 소리를 질러대는 생명체를 발견하게 되고 큰소리를 치는 나를 알게 되며 그로 인해 서럽고 야단스럽게 우는 아이를 마주하게 된다. 어디도 저 글과 닮은 구석이 없다.
오히려 정반대라면 모를까.
백번 양보해서 큰소리 한번 내지 않는 부모가 있다고 하자(존경합니다). 과연 소리 지르지 않고 야단스럽게 울지 않는 아이가 있을까?
그의 평온한 말에 웬 돌멩이냐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쪄랴.
인간은 모두 어떤 모양에서든 자신의 상황과 모습을 빗대는데 문장 속 일상생활과 나의 것은 너무나 다르다. 내겐 은밀하게 살아가는 은근한 시간보다 악착같이 뻗어 내는 시간이 여지없이 길다. 엉킨 머리칼을 겁겁한 대로 한데 뭉쳐 묶어 버리는 모양새다. 손가락을 세며 가만히 하루를 돌아보자면 결을 고르며 마음을 빗을 여유는 하루에 딱 한 번뿐이다.
바로 아가가 잠에 든 시간이다.
오직 그 시간만은 온 만물에 정적이 일고 시계 초침 소리만 울린다. 아가의 볼록한 배는 고르게 올라갔다 내려가며 조그만 마늘 코에선 더운 숨이 나오고,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은 고래의 등을 닮아 고요하다. 잠든 아가는 유난히 땀이 많이 나 이마고 머리칼을 쓸며 부채질을 해준다.
자장, 자장, 잘도 잔다.
그렇다. 그 자장가의 시간이 유일하게 다니구치 지로의 표현과 일치하는 순간이다.
순간은 길지 않다. 금방 깨어난 아윤이가 눈을 손톱 달처럼 하며 네 개의 이를 한껏 드러내 웃기 때문이다. 다시 머리를 질끈 묶고 자장가의 여운을 밀어낸다.
"오구, 잘 잤어. 내 새끼."
그러나 생각한다.
있는 힘껏 제 생의 에너지를 내뿜는 존재만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그 존재가 커가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이끌고 곁에서 바라보는 것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
어김없이 생각한다.
조용하고 은밀한 고등孤燈의 삶은 아마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오늘도 아윤이는 작은 고질라처럼 아빠가 실컷 쌓은 블록을 다 부수며 있는 대로 짜증내고 울기도 했으며 물장구치다 꺄르르 웃기도 했다. 가로드는 햇볕 아래서 돌꼇잠을 잤고 자다 깨서 예의 익룡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계속 계속 내가 있었다. 함께 웃고 가끔 큰소리를 치고 자주 어르고 달래기도 하는 '엄마'로 말이다.
늘 그렇듯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다니구치 지로의 글에 다른 전제가 붙어도 괜찮겠다.
'아기가 잘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를 첫머리에 두는 것이다. 아기가 자고 나면 모든 이는 조용한 밤의 생명체로 변하고 그들의 행동은 비늘처럼 은밀해지는 까닭이다.
이 두 가지 전제가 나의 생활로 저 문장을 이해하려 하는 노력이다.
어쩌면 사는데 하등의 필요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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