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기와 나

장마

20200802, 비의 감각

by 윤신

비 오는 날이 좋다.

집안에서 창 너머의 비를 바라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빗방울에 우주의 무게가 살짝 더해져 하늘이 온몸을 누르는 듯 바닥에 늘어지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이런 날은 우유 거품이 쫀득한 카푸치노를 상상하며 차를 우린다. 커피를 마시는 십분 남짓의 호사를 누리기 위해 아기를 데리고 비를 뚫을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T2(호주의 차 브랜드)의 프렌치 얼그레이를 택했다. 예의 얼그레이에서 느껴지는 베르가못 향보다 화사한 꽃 내음이 더 진한 차다. 맑은 날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몰라. 첫 모금에 생각했다. 찻잎의 붉은색이 아래로 아래로 퍼졌다.



단조롭게 두드리는 빗소리도 좋다. 창문이나 지붕, 마당에 떨어지고 이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다른 세상에 서있는 기분이 든다. 비록 거창할 것 없는 '비가 오는 세계'일뿐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파트에 살다 보니 빗소리를 듣기가 참 힘들다. 온 창문이 이중으로 꼭꼭 잠긴 데다 땅은 20층 아래에 있고 지붕은 10층 위로 있으니 어림없다. 가랑비든 소나기든 여우비든 기억이 저장한 소리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은 딱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비와 바람의 모습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건 직접 들어야만 했다. 눈 오는 날처럼 온통 하얀 세상과 그 도화지 사이로 기세 좋은 비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여름에 꼭 들어야 할 필수 코스다.



아기는 분명 창틀에 고인 구정물을 가지고 놀 테니 먼저 그곳을 청소하기로 했다. 창틀에 끼여있던 내 게으름이 흙물이 되어 빗물에 섞여 나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비바람을 맞았다. 상상 그대로의 빗소리다.
거세고 힘찬 물줄기의 아우성.



예상대로 아윤이도 어느샌가 곁에 다가와 창틀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비에 얼굴을 갖다 댄다. 나란히 창가에 앉아 비를 향해 입을 헤-벌리고 웃는다. 둘의 얼굴에 크고 작은 빗방울이 맺힌다. 그러다 갑자기 바람이 우리를 향해 비를 던진다. 얼굴에 쫄딱 비를 맞은 우린 더 크게 웃는다. 아무 이유도 없이 부는 바람과 빗방울에 마냥 소리 내어 웃고 얼굴 보고 웃고 또 웃는다.


얼굴에 비를 맞다 길 건너 아래를 봤다. 우리 아파트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중이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새벽부터 시작한 공사가 잠시 멈춘 상태다. 한동안 장마라 공사도 지지부진한 모양이다. 매일 소음과 분진을 뿜어대는 그들에게 쌤통이다, 고소하다 싶었지만 그들도 결국 어느 집의 한 사람이겠지. 그칠 줄 모르는 비로 인해 멈춰 선 포클레인과 이름을 알 수 없는 큰 장비들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들이 몸을 피할 트레일러가 있어서 다행이야. 생각하던 중 어디서 바삭바삭거린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을 찾으니 오물거리는 아윤이의 입이다. 머리보다 빨리 엄마의 직감은 바로 손가락을 뻗어 그 근원을 끄집어낸다.

꺅!

손톱만 한 크기의 갈색 벌레다. 아마도 비를 피하려 들어왔다가 생을 마감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에겐 벌레의 운명보다 아가 식단의 위생이 더 중요하다. "이런 거 먹으면 안 돼!" 놀란 눈으로 말하는 내게 갸웃거리던 아윤이는 이내 방싯 웃는다. 비올 때 조심해야 할 건 때끼고 물고인 창틀뿐만 아니라 날아든 벌레까지 포함시킬 일이었다. 생명 존중과 안심 식단, 서로서로 각자를 위해 창문 여는 건 늘 조심해야겠어. 한껏 젖은 얼굴로 이중창을 닫으며 큰 깨달음이라도 한 양 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옆 아래 아윤이는 여전히 비를 보다 나를 보다 웃었다 했다.


아기를 낳고 비가 온 적은 더러 있었으나(아윤이를 낳고 그달에만 태풍이 몇 번이나 왔다) 오늘에야 함께 '첫비'를 경험했다고 느낀다. 처음으로 같이 빗소리를 듣고 비를 맞고 비바람을 감각한 하루라고 말이다.
아마 아이는 훨씬 더 많은 비를 맞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이 시원함은 때로는 서늘함으로 때로는 기다림으로 때로는 무력함으로 때로는 감사함으로 바뀐다는 것을.

하지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 시작은 웃음이었다는 걸 말이다.


참, 그러고 보니 그 갈색 녀석 아직 창틀에 끼여있을 텐데 이걸 어쩌나. 놀라고 사실은 좀 징글맞아서 차마 그 자리에서 내다 버리질 못하고 창틀에 냅다 던지고 문을 닫은 것이다. 뭔가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라도 알면 좋겠지만 내겐 그런 능력이 없다. 그렇다고 창을 열고 씩씩하고 용감하고 깔끔하게 찌부러진 다리 많은 괴물을 맞이할 용기도 없다.
그러니 난 결국 이 수를 쓸 수밖에 없다.
우리 집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를 투입시키는 수밖에는 말이다.

보고 있나, 아윤이 아빠.



_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