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즈음의 일기
친구는 한번 말한 적이 있다.
아니, 우편에 부쳤으니 쓴 적이 있다고 해야겠다. 그 둘이 뭐 그리 다르냐고 물어도 할 말은 없다. 넘쳐흐르는 말 가운데 몇 문장을 고르고 닦아 흩어지는 공중이 아닌 가지런한 종이 위에 놓는 일을, 그 선별과 정성을 내 짧은 생각과 말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탓이다. 아니, 어쩌면 손으로 쓰는 글과 입으로 전하는 말은 맡은 바 역할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나의 까탈스런 고집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손과 입이 굳이 따로 붙어있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같은 길이라도, 걸으며 보는 풍경과 자전거나 차를 타며 보는 것은 같지 않다. 그러니 같은 말이라도 행간을 읽으며 보는 글과 눈을 마주치며 듣는 말은 같을 수 없다. 할 말이 없다고 하곤 어느새 막무가내로 적어 내리고 있다.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야지.
친구는 한번 쓴 적이 있다.
그는 편지에서 '비어있는 땅'이라는 뜻의 여지餘地가 좋다고 했다. 봄과 여름 사이의 봄이 될 여지, 여름이 될 여지가 있는 시간. 즉 계절의 경계들이 좋다는 글이었다. 아마 여름이 오기 전 6월에 쓰여진 편지일 것이다. 책 사이에서 발견(보물처럼)한 두장의 안부를 다시 읽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여지 있다'는 말을 한자로 풀면 '비어있는 땅이 있다'는 말이 된다.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 어떤 땅도 될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땅을 이미 갖고 있는 그런 상태가 여지 있는 형편이었던 거다. 그 말은 어떤 면에서 여유롭다는 뜻이겠지.
다시 생각에 퐁당 빠진다.
그렇담 내 하루엔 과연 빈 땅이 있을까?
단순하게 대답부터 하자면 '아니오'다.
당연한 말이다. 예측 불가능한 육아에서 빈 땅을 찾기란 코앞에서 무지개를 보는 것처럼 힘든 일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상에 매 순간 조금씩 여유를 두(려고 하고 있) 긴 하지만 '여지 있다'라고 말하기엔 하루가 너무 빡빡하다.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캄캄한 밤이 되기까지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작은 인간을 향하고 그나마 잠시 쉴 수 있는 아기의 낮잠 시간도 고스란히 쉴 수는 없다. 혹 낮잠에서 깨지는 않을까 레이다를 계속 켠 채로 책을 읽고 설거지를 하고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간을 불평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이런 일상을 '여지 있는 하루들'이라 부르기엔 힘들다는 말이다. 빈 땅이 있다고 하기에 나의 모든 토지엔 뜨거운 생명력을 지닌 아윤이라는 작물이 오밀조밀 모여있다. 터질듯한 볼과 보드라운 머리칼과 심장이 멎도록 환한 웃음을 품고 쑥쑥 자라나고 있다.
그렇게 내 온 땅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아윤이는 이제 곧 첫 생일을 맞지만 아직 '엄마'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어쩌면 안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둘 역시 천지차이지만 거기에 대해 쓰기에 난 지금 너무 피곤하다). 두 발만을 디디고 걷는 것도 고작 세네 걸음이다. 하지만 355일 동안의 시간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나로선 오늘의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일 년 남짓의 시간 동안 생명이 이렇게 변하고 성장할 수 있는가 놀라울 뿐이다. 어제의 얼굴이 다르고 오늘의 몸짓이 다르고 내일의 표현이 다를 것이다. 예전엔 빤히 바라보기만 하던 나의 행동을 조금씩 따라 하기도 하고 제가 먼저 장난을 걸기도 한다. 태어나고 이삼 주 동안 눈도 뜨지 못하던 3.6kg의 작은 생명이 이젠 12cm 정도 되는 발을 한 발씩 떼며 아장아장 내게 걸어오기까지 한다. 이내 폭, 주저앉지만 다시 손으로 의자를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눈을 맞추고 헤헤 웃는다.
다시 생각한다(이쯤 되니 생각에 빠지는 게 내 특기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여지없지 일 년을 달려온 것은 과연 나였던가,
아윤이었던가.
있는 힘껏 하루를 살아낸 사람은 과연 나였던가,
아윤이었던가.
우리에게 온통 낮이 아닌 밤이 함께 있는 이유는 휴식에 있을 것이다. 농사의 휴지기처럼 땅을 쉬게 하고 양분을 끌어모으기 위한 시간 말이다. 그래서 밤이 찾아오면 하루 내 지치지도 않던 아기가 눈을 비비고 잠에 들고 나와 그도 각자만의 쉼을 갖는 거겠지. 맹렬히 보낸 하루의 긴장을 풀고 피로한 몸을 쓸며 오늘을 마무리하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말이야. 그렇게 보면 지금 바로 이 순간, 하이드로 변하기 전 지킬이 그렇게 외치던 지금 이 순간이 내겐 여지의 시간 아닐까. 내가 원하는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 빈 땅의 순간, 매일 아기가 잠들고 가졌던 세 시간이 채 안 되는 달콤한 이 시간이 말이다. 아윤이는 곤한 잠에 들고 나는 키보드를 타닥이고 그는 게임 주인공에 빙의된 이 시간.
결국 우리는 각자의 여지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그런들 아닌들 어떤가 싶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라기보다 뭐래도 좋다는 하여가 같은 마음이다. 온종일 우리 곁에서 종종 돌아다니고 단호박도 가래떡도 잘 먹는 아가가 내 품에서 이렇게 쑥쑥 잘 크고 있는데 비어있는 땅이든 얼어있는 땅이든 그 무슨 상관이랴. 어느새 엄마의 마음으로 돌아가 이 생각 저 생각 다 편지 속으로 접어 책 속에 넣어버린다. 여지 따위 생각도 않고 알알이 순간에 충실할 뿐인 아기의 엄마로 돌아간다.
우리에겐 아윤이가 있는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흥얼거리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