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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Mar 28. 2021

새벽 다섯 시

20200829, 새 책상과 새 침대

스물하나에 집을 떠나 서른셋에 돌아갔다.

돌아가기 전 마지막 출발지는 9천km 떨어진 타국이었다. 긴 시간과 먼 길을 돌아 다시 엄마 집에 도착한 나에게 그녀는 난데없이 책상과 침대를 사자고 했다. 서른이 넘은 딸의 손을 잡고 칠성시장 가구골목으로 향해 여러 목재를 요리조리 뜯어본 오십이 넘은 엄마는 흡사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의 것을 닮은 아니 분명 그러할 연분홍 책상과 침대를 골랐다.


“이게 딱이네. 그제?”

“응응. 이게 이쁘네.”


실은 오래된 책상도 싫지 않았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새 책상을 갖는 것도 쑥스러웠다. 책상에 앉아 공부할 나이도 아닌데 이제와 하트가 타공 된 연분홍 자그마한 책상을 인생 첫 새 책상으로 받다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아무래도 큰마음먹고 가구를 사는 구두쇠 엄마의 기분을 방해할 순 없다. 묵묵한 진심이나 삶의 흐름은 때로 실질적인 필요보다 우위에 있는 법이다. 그녀는 현금을 지불했고 집에 유물처럼 남겨진 낡은 책상은 버려졌다. 그리고 우린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쇠락한 장터를 쏘다녔다. 개와 고양이, 닭과 꿩을 가뒀던 빈 우리가 퇴적층처럼 쌓여있고 좁은 골목엔 갖가지 먹을거리와 반찬들이 몇 대를 이어왔을 자리에서 애꿎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바닥은 뜨거웠다.



그녀는 왜 내게 자그마한 책상과 자그마한 침대를 사줬을까.



내가 돌아온 곳이 나의 자리라고 말해주고 싶었을까. 늘 그렇듯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녀만의 언어였을까. 혹시 삐그덕 대던 낡고 닳은 책상이 십여 년 동안 못내 마음에 걸렸던 건 아닐까. 아니면 삼십 대의 엄마가 딸에게 못해준 일을 삼십 대의 딸에게 해준 걸까.

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마음이 어딘가 애달프고 다정하게 닿았다. 생에 처음으로 딸을 데리고 나와 무언가를 사준 엄마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느꼈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질문한다.

잃을 것이 없어 무작정 뛰어들고 상처 입어도 다시 뛰어드는 혼자만의 업보를 그만둬야겠다고 몰래 생각한 건 그때였을까. 형벌에 가까운 것이라 여기던 삶에 감사를 적어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던가. 글쎄.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 잘 모르겠다.

그러나 생채기를 핥으며 내내 옹송그리던 마음이 찾아온 곳은 결국 엄마였음을 안다.   



여름에서 가을로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각.

잠에서 깨 울어대는 아가의 등과 허벅지를 쓸어내리며 대구의 엄마방 옆 작은방에서 오도카니 자리를 지키고 있을 책상과 침대를 생각한다. 골목에 쌓여있던 반찬들의 역사처럼 내방 가구들도 몇 대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응응’하며 잠꼬대하는 나의 딸에게 ‘응응 괜찮아’ 대답하며 너에게 물려주면 좋겠다 생각한다.

핑크와 연베이지가 섞인 단단한 목재로 된 엄마의 책상과 침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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