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0
순진했다. 아니, 뭘 몰랐다는 말이 더 맞다.
'아이는 혼자 큰다'라는 문장을 그 외 다른 습관적인 관용구처럼 곧이곧대로 믿었다. 염소똥을 장난감으로, 후미진 골목을 놀이터로 삼아 하루 온종일 쏘다니던 회색벽투성이의 유년시절을 생각할 때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절 기억 내내 엄마는 등장하지 않지만 어쨌든 난 어른이 되었으니까.
아기와 생활한 지 이제 1년.
하지만 세상에 '그냥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다른 클리셰의 등장이다. 아기는 절대 그냥 밥을 먹지 않고 그냥 서서 걷지도 않으며 그냥 혼자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다. 하물며 잠에 드는 것조차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아기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기까지의 매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와 손길은 필요 불가결하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역할은 대체로 엄마가 맡고 있다. 호흡처럼 무의식적이고 도서관의 책처럼 당연한 존재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 오늘의 내 배는 터질 듯 부푼 풍선을 넣은 주머니처럼 둥글고 커서 제대로 앉지도 눕지도 못했다. 온몸의 중심이 한껏 나온 배에 기울어졌고 배영을 할 때면 둥실한 배만 물에 동동 떠다니는 모습이었다. 딱 일 년 전만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풍선은 주머니에서 나와 제 손가락으로 밥알을 집어먹고 거실의 끝에서 끝까지 도도도 걸어 다닌다. 퐁퐁 튀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튀어 다닌다. 그 풍선을 졸졸졸 따라다니는 사이 벌써 364일이 지나버렸다.
내일은 아기의 첫 생일이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태胎난 입장에서 살다가 그 어미의 입장이 되어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나의 딸에 대한 애정과 축하만큼 나의 엄마에 대한 애정과 감사가 피어난다. 모름지기 '생일'에는 태어난 자에 대한 축하만큼 탄생의 결과와 과정을 이뤄낸, 그럼에도 배경처럼 묻혀버린 잉태한 자에 대한 축복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두개골을 조으고 머리를 여러 각도로 돌려가며 죽을힘을 다해 산도를 빠져나온 아기의 노고만큼 그 붉은 아기를 내보내기 위해 온몸이 떨리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작은 생명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엄마의 노고, 그 후 아기의 삶의 세계를 짊어져야 하는 엄마의 책임도 함께 치하해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이다. 번드르르한 시상식에서의 여우주연상, 대상은 아니라도 아기가 태어나고 한순간도 '쉼' 없이 달려온 개근상 정도의 평범하고 정직한 상은 줄 수 있지 않을까.
두 입장에 모두 서보니 알겠다. 그 어떤 아기도 절대 혼자 크지 않는다는 것과 나 역시 그랬다는 것.
엄마의 뱃속에서도, 세상의 뱃속에서도.
조각의 기억이 콜라주처럼 자리한 출산의 시간.
공중에 뜬 몸 가운데 붉은 선이 지나고 차가운 공기 사이로 털실처럼 꼬인 탯줄로 두 생명이 연결된 시간.
사아각.
연필 소리를 닮은 가위질이 지나고 탯줄 사이로 툭하고 핏방울이 맺히던 시간.
그러니까 벌써 1년 전이다.
그리고 이제야 1년이다.
기념일이란 사람의 기분을 묘하게 만든다. 단지 순간을 살아낼 뿐인 직진 혹은 정지된 마음을 거꾸로 방향을 돌려서 그땐 그랬지 시시콜콜한 감정과 기억을 끄집어낸다. 구불구불 곡선을 만들어 낸다. 자정 12시 반에 터진 양수와 정오 12시 반에 벌어진 자궁.
한 개인의 열두 시간의 사투와 그 이후의 일 년.
자주 깜박하는 건 나만의 것이 아닌 인간 특유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맹숭맹숭한 달력의 검은 날짜에 붉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나서야 '그날'을 기억한다. 달력에 친 동그라미와 작은 글씨는 다시금 기억을 새기려는 인간의 의지다.
다시 쓴다.
내일은 아윤이의 생일이다.
아기의 첫 숨이 울음에 섞여 내가 내쉰 공기와 맞닿은 날.
탯줄이 아닌 숨으로 연결된 날.
또다시 쓴다.
생일을 생일답게 만드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다.
나의 생일날, 혹은 그 누군가의 생일날이 되면 난 아마 마주한 사람 외 한 사람을 더 떠올릴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의 공기 같은 그림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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