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쓴 일기입니다
겨울의 한가운데보다 가을의 끝자락이 더 시린 건가. 손끝과 발끝이 빨갛게 차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지고 떠나감을 알면서 새삼스레 슬프다. 찾아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염려하고 늙음을 서러워한다. 잠시 왔다 가는 모든 생명(비생명 역시)을 애도한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결국 산다는 건 스치고 말 찰과상인가 따위의 중학교 일기장에나 적었을 문장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거실에 떨어진 빨갛고 노란 장난감을 줍는다. 가을을 타는 걸까. 바람이 차다.
아무리 가을바람이 쌀싸름하다해도 가을을 타는 건 사실 호강에 가깝다. 이유는 이렇다.
인생 15개월 차에 접어든 아윤이는 물을 좋아한다. 물의 양이나 장소는 상관없다. 색마저도 개의치 않는다. 변기의 물이나 욕조의 물, 국그릇에 담긴 국물마저도 아기에겐 장난칠 소재에 불과하다. 고양이가 마실 물그릇이라고 다를 리 없다. 고양이용 큰 대접에 담긴 물을 쏟고는 바닥의 물로 찰박찰박 장난을 치는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일까. 그 후의 상황도 그렇다. 나와 딱 눈이 마주치고는 요리조리 눈망울을 굴리다 헤에 하고 활짝 웃어버리는 것 말이다. 그 웃음에 한껏 상기된 얼굴이 맥없이 탁 풀어진다. 그래, 고양이 물그릇이 거기에 있는 게 잘못이지. 계절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아이가 자람에 따라 집안 물건의 배치는 요리조리 바뀐다. 계절이 지나는 속도의 몇 배속으로 아이는 자라고 고양이의 물그릇의 위치는 높아진다.
그리고 용감무쌍하게도 아가는 모든 사물을 거침없이 대한다. 호기심 가득한 눈과 손, 가끔 그리고 자주 입으로 모든 것을 탐험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른 손톱만 한 벌레마저도 꼬막 같은 손으로 조물거리다 입에 쏙 넣어 버린다.
물장난과 벌레는 가을이 호강인 이유 중 고작 하나일 뿐이다.
세상 바쁜 아기 곁에서 덩달아 세상 바쁜 엄마가 가을의 호젓함에 젖는 건 그야말로 호강에 겨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계절을 느끼는데도 마음의 여유는 필요 불가결한 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곁에서 맴도는 자그마한 아기의 가을 타기 방해에도 불구하고 난 호강에 겨운 나머지 가을을 타고 있다. 아 사라지는 세상 모든 쓸쓸한 것들이여,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역시 엄마는 별 수 없다.
꽁하니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다가도 재빨리 아기의 입으로 들어가는 단풍잎을 낚아채고 늘어나는 흰머리(검은 머리의 사망)에 애도할 새도 없이 금방금방 자라나는 아이의 손발톱을 장난감처럼 생긴 가위로 잘라야 한다. 지켜내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것을 아쉬워 하기보다 여기저기 출몰하는 아기의 호기심을 지켜봐야 한다.
떨어지는 나의 잎에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뿌리를 내리고 물을 한껏 빨아들인 아기의 새싹을 지켜줘야 한다. 별수 없는 건 별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갔고 돌아갈 것이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
성화는 내어서 무엇 하나
인생 일장춘몽인데
아니나 노지는 못하리라
어쩌면 가을에 딱 어울리는 건 Eddie Higgins Trio의 Autumn Leaves가 아닌 태평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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