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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May 28. 2022

예삐가 죽었다

엄마가 기르던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해


고양이가 죽었다. 2012년부터 엄마와 함께 살던 고양이다.


정말 딱 세 달 만 맡길게. 엄청 순한 아이야. 이름은 미유라고 해. 그동안 사료나 모래도 다 보내줄 테니까 딱 세 달 만 데리고 있어 줘.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설마 너한테 버리겠어?


설마라는 부사는 은근하고 음습한 예감을 동반하지만 백 프로의 확률은 아니기에 단언은 어렵다. 그저 말끝을 흐리는 메아리로 흘릴 뿐이다. 그래. 에이, 설마…. 하지만 꽤 높은 확률을 가진 '설마'의 법칙은 역시나 깨지지 않고 친구와는 연락이 두절된 지 벌써 7년째다. 그렇게 그 순한 아이는 십 년을 엄마와 함께 살았다. 무려 십 년. 그녀의 인생에서 십 년을 주욱 연달아 같이 산 생명은 없다. 아빠는 총 통틀어 8년, 나와 동생은 몇 년의 주기로 잠시 떠났다가 돌아오곤 했으니 어쩌다 눌러 산 고양이가 엄마의 일상을 속속들이 알고 한 번에 가장 오랜 시간을 산 생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단언컨대 아마 그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미유가 죽었다.  

우리나라 고양이는 야옹야옹 울고 캐나다 고양이는 미유 미유 mewmew 운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어쩌다 한국까지 와서 영어는커녕 무지막지한 사투리만 써대는 우리 엄마를 만났다. '고양이'를 '꼬내이'라 부르던 그녀는 말했다. 고마 도로 데꼬 가라.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내 친구도 나도 다른 나라로 떠난 뒤였다. 미유는 덩그러니 엄마 곁에 남았다. 미유 미유 울면 엄마는 '고마 시끄럽다' 했다.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던지 그렇게 순하다던 미유는 매일 저녁 엄마의 폭신한 이불에 똥과 오줌을 쌌고 엄마는 매일 이불을 바꿔 빨았다. 하지만 책임감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녀는 절대 고양이를 내치지 않았다. 둘의 시간은 세 달이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이 년이 되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둘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오구, 그래쪄요? 우리 애기 배고팠쪄? 비음 섞인 엄마의 아양과 교태를 난생처음 들었다. 안고 쓰다듬고 뽀뽀하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어느 생명체에게 그토록 애를 다하는 모습은 생경했다. 고양이가 기다린다며 일박 이일 여행을 가면서도 마음을 졸이고 고양이가 식욕이 없으면 뛰쳐나가 닭을 사 와 푹 고았다.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가 8살 즈음이니 고양이는 이미 노령이었다. 이도 슬슬 빠지고 털의 윤기도 포삭포삭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 고양이를 늘 예삐라 불렀다.

우리 예삐, 아이고 예뻐. 예삐가 제일 예쁘지.

예삐는 엄마가 새로 지어준 이름이었다. 미유가 입에 붙었던 내가 가끔 엄마에게 전화해 '미유 뭐해?' 물으면 '예삐 잔다'하고 대답했다. 엄마는 고양이가 더울까 봐 여름이면 직접 털을 밀어주고 예삐는 작은 물그릇이 아니라 큰 대야에 있는 물을 좋아한다며 굳이 화장실 문을 열어두고 살았다. tv를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에 들 때도 피아노를 칠 때도 예삐는 늘 엄마 곁 언저리에서 꼬리를 몸에 말고 꼿꼿이 앉거나 비스듬히 누웠다. 혹은 동그랗게 몸을 말고 털 뭉치 같은 발로 눈을 덮었다. 니는 내 없으면 우예 사노. 손 기름으로 털이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그녀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예삐는 그녀의 삶의 이유였다.



그런 이유로 예삐의 건강 상태가 안 좋을 때면 나와 동생은 무척 걱정했다. 상실감을 그녀가 홀로 견딜 수 있을까. 집안 곳곳에 뿌려진 예삐의 부재를 그녀가 외면할 수 있을까. 작년부터 나빴던 예삐의 건강이 올해 들어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조금씩 모아둔 한지(예삐가 죽었을 때 몸을 싸주려고 했다)를 밀어 넣고 여름맞이 준비를 했다. 고양이 털 바리깡을 꺼내고, 차가워서 여름에 예삐가 드러눕기 좋아하는 화장실 타일을 솔로 깨끗이 닦았다. 그런데 여름이 채 오기도 전에 예삐는 죽어버렸다. 일주일을 밥도 못 먹고 시름시름 앓다 결국 엄마가 일하러 나간 빈 방구석에서 홀로 차갑게 누운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예삐는 아픈 일주일 동안 긴 꼬리도 찾을 수도 없게 꽁꽁 숨어있었는데 유독 그날엔 평소처럼 현관에서 일나 가는 엄마를 힘겹게 마중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상하도록 무서웠다고 엄마는 고백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무서운 일은 여전히 존재하는 법이다. 고통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 채로.   



예삐가 죽었다.

'말하지 마라, 고양이 얘기하지 마라'. 엄마는 핼쑥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예삐라는 이름마저 자신의 입에 올리지 못했다(문득문득 실수로 손녀딸을 '예삐야'라고 부르긴 했다). 혼자 떠맡은 생명의 마지막 기억마저도 홀로 끌어안았다.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은 같은 종의 동물로 기억을 다시 새로 덮지만 엄마 같은 사람은 다시는 동물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유일한 그 생명만을 그리워할 뿐이다. 엄마 배에 누워 숨을 달싹이던 작은 코를, 큼큼한 발 냄새를, 빛에 날리던 하얀 털들을, 빤히 바라보는 투명의 유리체 같은 노란 눈을, 앉거나 누워있던 따뜻한 자리를, 엄마가 안고 산책하던 집 앞 길을, 새로 산 소파를 신나게 긁던 손톱을, 미리 알고 기다리던 귀가 마중을, 몸을 길게 쭈욱 늘리던 기지개를, 둘이 함께 보낸 긴 시간들을.



고양이는 죽으면 고양이 별에 간다는 말이 있다. 거기서 츄르를 먹으며 행복하게 살다 기르던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 곁을 찾아온다는 거다. 모든 고양이가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예삐는 확실하다. 엄마 곁에 쪼르르 달려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눈에 담고 싶어 기어이 아픈 몸을 이끌어 내 엄마를 마중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아직 엄마에게 할 수는 없다. 그녀는 아직도 예삐가 잠든 곳 근처에서 발길을 돌린다. 차마 그곳까지 가지 못하는 그녀에게 나는 다만 예삐는 행복했을 거라고, 엄마와 함께 살아 즐거웠을 거라고 시시한 말만 한다. 꽃이 피는 예쁜 봄에 나비처럼 떠났다고만 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기다린다. 엄마가 예삐의 이름을 발음하는 날을, 예삐가 자리한 곳에 함께 가자고 이야기하는 날을 기다린다.


예삐야.

엄마의 안과 곁에 따뜻한 온기를 줘서 고마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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