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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Jun 26. 2022

장마가 시작했다

비 냄새와 함께


비가 이렇게까지 온다고?

헛웃음이 날 정도로 비가 내린다. 댐 가득 가둔 물이 터지듯 참고 참은 눈물이 쏟아지듯 비는 멈출 줄 모른다. 시계는 고작 5m가 전부다. 비는 분명 투명할 텐데 온 세상이 하얗다. 이러다 차의 앞 유리도 깨지는 거 아냐? 비에 부딪혀 깨져버린 조각의 유리가 물방울이 튀듯 날아가는 상상을 한다. 잘게 부서진 조각들은 저마다의 길을 찾다 결국 어딘가로 떨어지고 흘러 다시 한번 자디잔 모래의 생을 살겠지. 그리고 실컷 바다를 구경하며 살랑살랑 춤을 출 거야. 비를 주체하지 못하는 와이퍼는 물에 빠진 사슴벌레의 앞다리처럼 허우적거렸다.



볼륨을 키웠다. 빌 에반스. 이런 날엔 교향곡보다는 솔로나 트리오가 제격이다. 비가 내는 단조로운 음률과 최소한의 악기가 섞어내는 소리가 좋다. 세차게 비 오는 날의 교향곡은 지나치게 사치스럽다고 생각한다. 오케스트라와 장대비의 협연은 꼭 각계의 거장들이 이루어낸 불협화음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가 점점 거세게 연주하는 탓에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피아노의 볼륨을 올리자 이젠 또 잦아든다. 비는 합주에 참 형편없는 것 같다. 제 기분대로 속삭이다가도 거칠게 화를 낸다. 칸탄도, 포르테, 피아니시시시모를 넘나들며 제 소리를 뽐낸다. 그저 속절없이 빌 에반스의 볼륨을 높였다 내렸다 하다가 그만 포기에 이르렀다. 지금 비는 한 시간 내내 포르티시모의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연주하는 중이다.   

갓 잘려나간 풀냄새와 콘크리트 냄새, 흙탕물, 물비린내 등등이 섞여 공기 중을 떠다닌다. 창문을 꼭 닫고 에어컨을 약하게 틀어도 비 냄새는 어김없이 차 안에 탑승해있다. 떨어트려낼 수 없는 승객처럼 바로 옆에 앉아 슬쩍 눈인사를 한다. 안녕? 나 기억해? 차 안에 진동하는 비 냄새가 어느 지난 하루를 폭우처럼 쓸어왔다.



그날은 오늘보다 더 미친 듯이 비가 퍼부었다. 질식할 것처럼 공기가 물처럼 흐르던 날이었다. 그와 난 그가 한참 아끼던 레인지로버를 타고 비 오는 길을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좋아하는 비건 햄버거를 포장해 그의 집에 드러누워 영화를 보며 먹을 작정이었다. 찻길로 물이 넘쳐 길가에 계곡이 생겼다. 하늘은 며칠째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모든 수분을 지상에 토해내려 했다. 온통 비였다. 길가에도 우리가 자주 가던 브런즈윅 카페의 라테에도 자기 직전의 창밖에도 그렇게 비 냄새가 섞여 들었다. 볕에 잘 그을린 그의 몸에서도 비릿한 물 내가 났다.

나는 그에게 비처럼 미쳐있었다. 쏟아내고 쏟아내고도 더 쏟을 게 있었다. 우린 젊었고 어디로든 떠났고 무슨 얘기든 했고 서로를 알았다. 적어도 그때의 난 그렇다고 믿었다. 이상할 정도로 텅텅 빈 그의 집에 도착한 뒤 그는 맥주를 사러 간 참이었다. 영화를 찾으러 그의 랩탑을 켜다 잔인하도록 단란한 가족사진을 발견했다. 어린 와이프는 작은 두 여자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의 한 남자가 그 옆을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내가 꿈꾸던 완벽한 가족이었다. 숨을 참았다. 거친 빗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숨을 쉬어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사고가 정지된 나는 비가 되었다. 비가 되어 온 방에 쏟아졌다. 그러고는 곧 흐르고 흐르다 폭포로 떨어져 버렸다. 그날의 난 폭우가 되었다. 그를 한참 아끼는 와이프가 사준 레인지로버와 그는 나의 빗물에 잠겨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내게 더이상 찾을 수 없는, 실종된 사람이 되었다. 



끝없이 내릴 듯하던 비가 잦아들자 트리오의 곡이 돋보인다. 브러시로 하이햇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낮은 비와 어우러진다. 뭐야, 너도 합주가 되는 녀석이었잖아. 운전대를 잡은 힘을 슬며시 빼고 창밖을 본다. 밀려가고 쓸려오며 비는 요란한 춤을 춘다.

이제 막 장마가 시작되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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