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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Oct 03. 2022

우리 집에는 바다가 있다

놀러 올래요? 


우리 집에 바다가 있어. 놀러 올래?

아이의 말에 이내 파란 물결이 일렁이는 거실을 상상한다. 이곳은 서해니까 해와 달의 장력과 시간에 따라 물은 밀어 들어오고 나갈 것이다. 한낮의 정오, 모래와 작은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밀려드는 바닷물 냄새를 맡는다. 흰 조개 하나가 의자 아래로 데구르르 굴러들어가자 선잠에 들던 고양이가 기지개를 켠다. 거실이 온통 짙은 푸른빛이다. 아이의 말에는 환한 빛이 있다. 물러설 수 없는 직관과 시적인 허용이 가득 찬 투명한 빛이.     



아이는 분명 친구와 함께 집에서 놀고 싶어 집에서 본 것 중 가장 예쁜 것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제 늦은 오후 우리는 베란다에 앉아 함께 책을 읽었고 큰 창 너머로는 눈부신 바다가 빛에 반짝이며 대답하고 있었다.

'바닷속에서 사는 인어공주는 물 밖의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서 몰래 나왔어요.'

바다는 산호처럼 붉은 머리의 인어공주가 사는 곳이자 가끔 맨발을 담그고 부서진 조개껍질을 봉지 한가득 주워 담는 곳이었다. 아이의 친구는 2개월 더 빨리 태어난 탓인지 더 어른스럽다. 아니야, 바다는 저 멀리 있어. 차 타고 가는 데야. 36개월 아이의 이성은 34개월 아이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견고하다. 하지만 34개월 아이의 신념 역시 맨들맨들 작은 돌멩이처럼 단단하다. 아니야. 우리 집에 바다가 있어.

그리고 이내 나에게 동조의 얼굴을 보내는 아이를 향해 난 어쩔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우리 집엔 바다가 있지. 베란다 너머로 보이던 바다가 어느새 우리 집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확실한 무언가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배운 말은 '이거'였다. 그 단어를 가르친 적은 없으나 이거 하고 싶어? 이거 마실래? 같은 말의 습관이 그대로 아이에게 옮겨갔다. 돌이 지날 즈음 아이는 '이거'를 연신 외쳐댔고 '이거'와 함께 울고 웃었다. 보통은 아빠나 엄마부터 발음을 시작한다던데 이 아이는 욕망의 화신인 걸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욕망의 대상은 유난히도 소소해 우유, 빨대, 고양이 정도에 불과했다. 욕망의 화신도 아기의 상태라면 별것 아니구나 웃었다. 그러던 아이가 이제는 그 어떤 주저도 없이 제 생각을 이야기한다. 버릇을 고쳐줘야지 싶어 일부러 도와주지 않는 나를 향해 '엄마는 내가 다쳤으면 좋겠어?'라는 맹랑한 말을 하다가도 '내가 아프면 엄마가 속상하잖아'라고 회유한다. 바람에 숲이 사락대듯 쉬지 않고 재잘대는 아이를 보며 스스로 인정한 몇 가지 절대 진리를 떠올렸다.

  

하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둘, 모든 것은 변하고 지금 이 순간 또한 지나간다.

셋, 아이는 자란다.     


한 문장으로 적어 보자면 모든 것이 지나가고 변하는 이 시간에도 불완전한 내 곁에 선 아이는 여전히 자란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문장의 목격자로 매일 아이의 자람을 증언한다. 달포 전과 지금이 다르고 내일은 또 오늘과 다를 것이다. 시간은 내가 인식하는 것보다도 빨리 흘러 어느새 아이는 내가 아는 단어와 사물 너머의 세상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수십 번 엄마- 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줄고 내 손끝이 닿는 자리에서 말갛게 웃는 얼굴을 쓰다듬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아이의 손을 잡던 나의 걸음은 느려지고 어느 틈에 나를 앞서 걷는 아이의 등을 다만 바라볼 것이다.      



한번 거실에 가득 찬 바다는 빠져나갈 예정이 없다. 달의 인력이 아닌 아이의 언어가 부른 바다는 언제고 집안을 넘실대고 찰랑인다. 부정확한 발음과 몇 안 되는 모음과 자음의 조합이 부른 바다를 나는 사랑해서 매일 밤 들려주는 동화이야기에 은근슬쩍 몰래 집어넣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이야기 속의 인어공주는 문어 마녀의 독을 이겨내고 왕자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 집에 바다가 있어. 놀러 올래?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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