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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Oct 11. 2022

쓰는 사람

그냥 씁니다


어떤 날은 글이 생리처럼 터진다.

조금의 주저나 의도도 없이 울컥울컥 몸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통과해 몸 밖으로 배출된다. 오줌과는 다르다. 참을 수 없는 월례행사처럼 생각은 붉게 부풀어져 말 그대로 '터져' 버린다. 손끝의 타자로 글은 적히지만 시작의 근원은 자궁이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점자를 읽어나가듯 섬세하게 글자를 적다가도 그런 날이면 무언가에 압도되듯 글을 쏟아 낸다. 손가락이 머리보다 빠른, 그런 날이 있다.

글이 생리처럼 터지는 날.     



그러나 보통은 반짝, 하는 단어나 문장을 기다린다. 아니, 기다리기보다는 포착한다. 관찰하기보다는 알아챈다. 쓰고 싶은 미완성의 덩어리를 단어나 문장으로 일단 적고 본다. 그리고 대개 그것은 다양한 형태를 갖추었다.

만춘, 계절 냄새, 오백 원어치 떡볶이만큼 아는 엄마, 시시포스 노동의 반복, 난 니가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숨 쉬듯이,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의 한 구절로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개처럼, 행복의 원형, 새하얀 가르마, 떡잎의 시간 같은 것들이다. 운이 좋으면 이 들쑥날쑥한 형태의 글자 대부분은 단문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동시에 뭔 뜻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개처럼’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개처럼 신나게 짖고 싶은지, 거칠게 뛰어놀고 싶은지 동사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아, 방금 글을 쓰다 생각났다. 그때의 난 잔인하도록 순수한 개의 감정표현이 행복의 원형이라고 적힌 글을 보고 수긍했었다. 무구한 개처럼 살기를 원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 개같이 살자, 뭐 이런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단문을 쓴 다음에는 막무가내로 이어 쓰기 시작한다. 어떤 이야기가 써질지는 알 수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 이 글 역시 어떻게 끝이 날 지 알 수 없다. 요즘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의 결말만큼이나 이 글의 마무리가 궁금하다. 그나마 예상할 수 있는 건 여기에는 그 누구도 살해당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하여튼 뭐가 됐든 일단 써 내려간다. 쓰고자 하는 마음이 든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가능한 한 자연스러운 흐름의 리듬을 글로 만들어내는 것. 다행히 어떤 날은 한 호흡에 쉬지 않고 술술 풀릴 때가 있다. 기가 막히게 명료한 정신으로 손가락이 뇌에 직결되어 나조차도 감탄할 만한 글들을 쏟아낸다. 후, 이걸 내가 쓰다니. 이런 문장을 도대체 어떻게 쓴 거야. 잠시 자신을 천재라 의식한다. 하지만 그런 날은 내 생애 식욕이 넘치는 날 만큼 드물고 괴테에 빙의되었다고(최소한 하루키에 빙의되었다고 믿는다) 스스로 감탄하던 글들도 나중에 읽어보면 방구석 일기장 정도의 글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런 날을 제외한 대부분은 지독한 난항을 겪는다. 탱탱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글을 시작할 때는 좀 각 잡고 폼 나는 거창한 뭔가를 쓰고 싶었다. 배꼽에서 배꼽으로 이어지는 엄마와 딸, 뭐 그런 근원적이고 있어 보이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무의식과 손가락의 방향은 다르게 흐른다. 그러나 이럴 때도 난 쓴다. 글이 제멋대로 장르를 바꿔가며 춤을 춰대도 결국 쓸 수밖에 없다. 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쓰는 일 외에는 없다. 쓰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냥 쓸 뿐이다.

때로는 쓰려는 무언가가 단어나 문장이 아닌 순간일 때도 있다. 그럴 땐 사진을 찍듯이 머릿속 한순간을 캡처해서 수평을 맞추고 확대하고 크롭 한다. 색 보정도 들어간다. 글의 색감이 간혹 현실의 것과 채도가 조금 다른 이유다. 태양의 조도와 노트북의 조명이 다른 탓이기도 하다. 글로 옮기는 순간은 몇십 년 전이거나 당장 오 분 전이다. 이것이 전두엽의 무작위 선별작업인지 무의식의 어리광인지는 모르겠다. 역시 그저 쓸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터지지 않아도 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쓰는 사람의 이상향이다. 어딘가에 홀린 듯 쓰지 않아도 덤덤히 나의 한 조각을 고백하고 곪아버린 상처를 글자로 훑기도 하며 나를 쓸어내리는 것. 그러다 '나'가 '너'가 되고 머지않아 '사람들'이 되는 것. 자궁에서 시작해 지구로 뻗어나가는 것. 내 안으로 쏠린 눈들을 밖으로 끄집어 내 너를 보게 하는 것. 오늘도 타자기 위에 손을 올리고 헤매며 글자를 쳐나가는 이유다. 아마도 이쯤에서 마무리가 될 텐데.


역시 생리라는 단어에서 시작한 글이 이렇게 끝날 줄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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