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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Oct 19. 2022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첫 문장, 무화과, 헤어질 결심


카페에 들렀다. 며칠 뒤까지 내야 하는 글이 마음을 졸인다. 이걸 쓸까 저걸 쓸까 하는 사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일주일이 지났다. 오 마이 갓. 첫 문장만을 쓰고 한 시간째 제자리라니. 아니, 첫 문장이랄 것도 없다. 단 한 문장을 첫 문장이라고 말하기는 힘드니까. 어쨌든 그것을 계속 노려보자니 유일한 그 문장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쓸 말 없지? 네가 쓰는 글들이 재미없다는 거 너도 잘 알지?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나는 뭐가 됐든 무조건 쓸 거야. 쓴다고? 뭘? 그냥, 그냥 뭐든. 정신 차려, 그런다고 써질 것 같아? 인정해. 넌 아마 오늘 내내 나를 벗어나지 못할 거야.


짧은 한숨을 뱉고 일어섰다. 어느 정도 문장이 옳았다. 나는 쓸 말이 없었고 이런다고 써질 리는 더 없었다.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 그런데 타고 온 전동 킥보드의 배터리가 나갔다. 전원조차 켜지지 않는다. 출발하기 전 확인했을 때는 분명 한 칸 남아있었는데 고장이라도 난 건지 출발하고 일분도 안 돼 기계가 그만 멈춰버렸다. 전동 킥보드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어쩌자고 나왔을까. 간만에 생긴 휴식시간에 보려던 영화나 느긋하게 볼 일이지 뭣하러 곧 고장 날 킥보드를 타고 문장을 붙들고 시간 낭비를 하는 걸까. 고작 성질 나쁜 문장 한 줄 쓰려고?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쓰다 만 수많은 글들과 방치하고 망가져버린 기계와 심지어 잘 만나다 헤어진 여자 남자(그러니까 사람)들, 더럽게 맞지 않던 카지노 룰렛 검정색 28번과 그로 인해 탕진해버린 통장의 잔고, 하여튼 별의별 게 다 떠올랐다. 그런 날이 있다.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날. 자전거 주차장에 킥보드를 세우고 마트로 갔다. 며칠 전부터 그렇게 무화과가 먹고 싶었다.


무화과 한 박스를 샀다. 구월이 제철이라는 무화과는 여전히 싱싱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 알을 꺼내 살며시 반으로 갈라 부드럽고 축축한 속살을 베어 물었다. 작고 붉은 석류알을 닮은 알갱이들이 입안에서 터졌다. 달고 푸른 풀 맛이 났다. 빛과 바람의 맛이다. 몇 개를 더 꺼내 반으로 반으로 갈랐다. 무화과 껍질은 아주 연해 조금만 힘을 잘못 줘도 터지고 만다. 과실을 손으로 가르는데도 시기적절한 힘은 필요하다. 엄지손가락에 적당한 긴장과 힘을 주고 열매를 열자 다시 한번 싱그러운 냄새가 퍼진다. 달지만 이건 역시 향기로운 풀의 냄새다. 빛과 바람의 냄새. 어른이 되어 처음 먹게 된 무화과는 이국의 냄새가 났었다. 감, 사과, 수박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와 맛이었고 생과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접할 수 있는 건 동글납작하고 딱딱하게 말린 반건조여서 한참을 씹어야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톡톡 터지는 식감이 나쁘지 않아 가끔 간식으로 사 먹곤 했는데 처음 먹은 생과는 그것과는 기가 막히도록 달랐다. 은밀한 키스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데다 이 사이에서 터지는 쾌감이라니. 굳이 씹지 않아도 액체처럼 목구멍에 흘러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남쪽 지방에 살던 이에게 들으니 무화과는 꽤 접하기 쉬운 과실이었다고 한다. 문득 팔에 낀 박스의 생산지를 본다. 전남의 어딘가. 나에겐 이탈리아 남부인지 북부인지를 떠올리게 하는 과실이 전남에서 나다니 우스웠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그거 아니? 無花果. 무화과는 꽃이 없어.


집으로 돌아오니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세 시간 정도 남았다. 보려던 박찬욱의 영화를 튼다. 어느덧 미중년이 된 박해일을 보며 국화꽃 향기를 떠올렸다. 연극 영화를 전공이랍시고 종일 방이나 도서관에 처박혀 영화와 음악만을 취하던 시절, 어느 밤 그 영화를 틀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틀기만 했다. 나, 간다? 헤어진 남자 친구가 분당에서 내 자취방으로 찾아온 밤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 이 시간에 내가 거기로 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우린 헤어졌고 그에겐 새로운 여자 친구가 있었으며 그때는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난 대답했다. 응, 이리 와.

어쩌면 설레었을까, 겁이 났을까.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무슨 의미인지 알아? 그는 말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난 그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열두 시가 다 되어 그가 왔다. 아니면 열한 시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내 방도 밖도 모두 까맸다. 뭐 하고 있었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자신이 없었다. 우리 영화나 볼까? 어색하게 침대 밑에 쪼그리고 앉아 국화꽃 향기를 틀었다. 침대 바로 옆에 책상과 의자, 그 너머엔 냉장고 tv 모든 게 다닥다닥 붙어 있던 몇 평의 작은방이었다. 그와 난 오래 키스를 했다. 도톰하고 달콤한, 어쩌면 술맛이 섞인 무화과 같은 키스였다. 조금은 애가 타고 조금은 터질듯한. 그러나 읽는 당신에게는 아쉽지만 그게 끝이었다. 어쩌자고(여기서 후회가 조금 섞인 것을 당신은 알 수 있다) 난 계속 그를 밀어냈고 그는 화가 난 채 왼쪽이 꺼진 싱글 침대에 털썩 누웠다. 나 그럼 잔다. 여전히 나는 모른척했다. 응, 그래. 잘 자. 술에 취했던 그는 정말로 곤히 떨어졌고 난 틀어진 영화를 맥락 없이 봤다. 무슨 내용인지도 어떤 장면인지도 모른 채 응시했다. 박해일의 말간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 그는 물었었다.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 늦은 대답을 했다. 다음날도 그는 여전히 젊고 잘생겼지만 우린 더 이상 애타지 않았다.


「헤어질 결심」은 대단했다. 내 안에서 영화가 휘몰아쳤다. 인물과 색감, 자연의 정형과 부정형은 미친 듯이 밀고 당기며 2시간 동안 쌓였고 그 감정은 마지막 파도 씬에서 폭발했다. 시커먼 먹물처럼 내 안에 퍼졌다. 좀처럼 앉은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게 남은 자유 부인 시간은 30분 남짓. 몰아치는 감정을 가다듬고 무화과 세 개를 씻어 다시 모니터 앞으로 왔다. 나를 저주하던 첫 문장을 지우고 단어 세 개를 밀어 넣었다.

첫 문장, 무화과, 헤어질 결심.

뭘 해도 안 되는 날 굳이 뭘 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며 다시 무화과를 갈랐다. 세상에는 꽃이 없는 과일도 있고 문장이 없는 글도 있으며 섹스가 없는 키스도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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