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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Oct 28. 2022

시월의 일기

조금 일찍 시작하는 일 년의 정리


시월이다. 책에 질병처럼 붙들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해가 두 달 남았다. 손을 털고 발을 씻어도 글자들은 뺨에 붙고 침대와 이불에 문장들이 범람했다. 책은 덮어도 펼쳐지는,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눌렀다. 그러다 달력을 보니 남은 건 오직 두 개의 달, 어느새 반년이 흘러 2022년도 이제 한 계절이 남았다. 올해엔 우크라이나 전쟁이 났고 대통령이 바뀌었으며 여전히 서해에는 포탄이 날아들고 최저 시급은 9160원으로 올랐다.

그리고 나는 마흔이 되었다.



해를 시작하며 다짐한 목록이 있다. 매번 세우지만 매번 흐트러지고 분해되는 것들이다. 유혹이 넘치는 불혹이라는 특별한 숫자를 두고 거기에 뭐가 있었던가, 어떤 남다른 다짐이 있었던가 다시 살펴본다. 순서를 적는다. 


1. 대강 한 달에 한 편씩 열 편의 시 외우기

2. 지구와 집안의 건강을 위해 옷 &가방 안 사기

3. 80장짜리 짧은 소설 쓰기

4. 단상 같은 일기 일주일에 두 개 쓰기(길이 상관없음)

5. '사야나사나' 수련하기

6.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다 읽기     


특별한 것도 없지만 완성한 것도 없다. 시집을 곁에 많이 뒀지만 제대로 읽지 않았고 외운 것이라고는 단 한편도 없다.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어쩌다 한편씩 만났을 뿐이다. 최근에는 송승언 시인의 납골당을 소리 내어 읽었다. '묘한 게 좋은 건지 좋은 게 좋은 건지' 몇 번을 두고두고 읽었다. 거기에 옷과 가방 사지 않기라니.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라는 다큐를 보고 새긴 각오는 채 한 달이 가지 않았다. 하나 사서 오래도록 쓰면 더 좋은 것이라는 핑계를 두르고 야금야금 산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옷 사기 금지령은 1월부터 땡이었다. 그리고 짧은 소설이라는 80페이지의 소설 말인데, 말이 짧은 소설이지 80면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이야기는 나에게 대하소설과도, 그러니까 박경리의 토지만큼이나 서사가 긴 장편이다. 그것도 계속 계속 미루다가 이번 달에야 시작해서 고작 다섯 장을 썼다. 하지만 올해는 아직 두 달 남았으니 이건 아예 꽝은 아니다, 아마도 아직은.

나머지 목록의 변명은 이하 생략한다.



시를 좋아한다. 시의 간결함과 단어가 가진 무게를 찬미한다. 한 권을 내리읽지도 않으면서 시집을 사고 매해 시를 외우는 목표를 세우는 이유다. 또 가끔은 시를 쓴다. 내게는 예술문학 가운데 가장 열린 시작과 열린 결말을 가진 글이 시다. 때론 어린아이의 시가 더 성숙하고 팔십에 글자를 깨친 할머니의 것이 더 천진하다. 어떤 장황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간혹 시의 빈 공백에 드러나고 차마 작가조차 알 수 없는 동요가 글 아래에 침잠해 있다. 비교하자면 에세이는 쓰는 자의 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시는 쓰는 자의 깊은 숨소리가 담겨 있다. 너무 얕아서 의식하지 않으면 결코 들릴 리 없는.     



《서른의 무게》     

그것은 철저히 스물이 가진 청량감과도

마흔이 가진 고독함과도 다른

무언(無言)의 고단함이 있다     

그 고단함은 늦어리광으로 미뤄진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의 '서른'은 내부의 외부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는 나이다   

  

시간에 쫓겨, 일에 쫓겨

아슬한 청춘의 달콤함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이곳까지 왔다

뭔가 확고히 정해져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우유부단함은 더 이상 동화로 변하지 않았다     


서른의 색깔

서른의 냄새

서른의 감촉

서른의 발자국

서른의 무게

서른의 나     


너를 아직 모르고

세상을 아직 모르며

나를 아직 모르는 나에게

서른이란 어쩌면

가벼운 벌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덧 일 년도 중반을 지나

이 숫자가 지극히도 입에 바르지만 여전히 낯선 두 글자     


서른     


2012年 7月11日     



서른의 칠월, 그렇게 나는 혼자 시를 썼다. 자주 그랬다. 입을 새어 나오는 말은 일정하고 서툴러서 보다 심연에서 꿈틀대는, 속을 훤히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멋이 없어도 좋았다. 짧은 구절로 치환되는 단어의 나열을 보는 게 즐거웠다. 시드니의 칠월은 겨울이었고 내 방바닥은 차가웠으며 공기는 건조했다. 그래선지 그때의 일기에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즙처럼 배어들었다. 그것이 내가 들고 태어난 천성이라 믿던 때였다.



이 시에서 나는 마흔을 고독이라 적었다. 스물에 단단한 어른의 서른을 상상하듯 서른에 상상한 마흔은 어쩐지 쇠락하고 허물어진 사탑을 닮아있었다. 그게 '고독'이라는 단어를 그 자리에 두게 했을 것이다. 서른의 나는 인간은 태어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여겼고 허덕이다 이내 부숴질 나를 미리 애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 년 하고도 세 달이 지나 마침내 마흔이 되었다. 나는 가끔 고장이 날 뿐 부숴지지 않았고 살아갈 자리는 태어난 자리와 조금 다른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고 죽는 동일한 조건 하에 같은 수의 날과 달을 보내면서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각자 다른 시간을 만들어 낸다. 십 년의 날들을 겹겹으로 입고 나이테처럼 시간을 두르며 다시 한번 지금을 생각한다. 바람이 차다. 초겨울. 곧 십일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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